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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폴란드 왕 얀 2세 카지미에슈 바자(1648~68 재위)가 카자크족 반란 지도자 보그단 흐멜니츠키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준 전투(1651. 6. 28~30).
1648년 흐멜니츠키는 드네프르 강 유역에 살고 있던 자포로지안 카자크족들과 함께 폴란드 지배에 대항하는 반군을 조직했다. 폴란드인들은 카자크족의 자치를 제한하기 위해 그들의 수를 줄이고, 카자크족이 인접한 투르크와 크림 타타르족을 습격해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막고, 그들에게 농노상태를 강요했다.
카자크족은 몇 차례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하자 폴란드 왕에게 지보루프 협약(1649)의 체결을 강요했다. 이 협정에 따라 '등록된' 카자크인(즉 특권층을 구성하는)에게는 상당한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폴란드인이나 '등록되지 못한' 카자크인들의 협정에 대한 불만으로 18개월 만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공식적으로 카자크족은 투르크 술탄의 보호 아래 들어갔으며(1651. 4), 술탄의 봉신 크림 타타르족의 칸(왕)의 지원을 받아 힘을 증강했다. 6월 카자크족과 타타르 연합군은 폴란드를 향해 진군, 루츠크 남쪽 볼히니아에 있는 스티리 강가의 베레스테치코에서 교전을 벌였다. 카자크 병력은 폴란드군의 3배 가량 되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 타타르 칸과 그의 군대는 싸움터를 빠져나갔다. 이 행위를 놓고 일부 학자들은 반역 탈주라고 해석하고 다른 역사가들은 리투아니아군의 침입으로부터 키예프를 보호하기 위해 드네프르 강 가까이에 있는 다른 방위선을 구축하려던 군사작전이었다고 해석하는데, 이 일로 인해 수적으로 열세였던 폴란드군은 카자크인들에게 승리했다. 곧 이어 참패한 반란군은 비아야체르키에프에서 체결된(1651. 9. 28) 새로운 평화 협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비아야체르키에프 평화조약).
이에 따라 '등록된' 카자크인의 수는 4만 명에서 2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지보루프 협약에서 지정받은 지방에 정착해 살며 그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카자크족과 폴란드 의회(Sejm)는 모두 이 새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1654년 1월 카자크족은 러시아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합병(페레야슬라프 연합)되는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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