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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 8. 7, 미국 디트로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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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1. 12. 9, 뉴욕 뉴욕시티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정치학자·외교관.
20여 년 이상을 국제연합(UN)의 평화유지 활동에 헌신했으며, 아랍-이스라엘 휴전협상을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195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국제관계론을 전공한 뒤 워싱턴 D. C.의 하워드대학교에 부임해 정치학과를 신설했다. 로젠월드 재단의 후원을 받아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지역을 돌아보고 위임통치령 토골란드, 식민지 다호메이의 통치방식을 연구했다. 노스웨스턴대학교와 런던경제대학교에서 얼마간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한 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체류했다.
1938년 스웨덴의 사회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미국 내 인종관계연구를 시작했고, 1944년 기념비적인 저작인 〈미국의 난제 An American Dilemma〉를 발표했다(→ 〈미국의 딜레마 : 흑인문제와 현대민주주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육군부·전략국·국무부에 몸담았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 UN의 창설을 위한 기초계획 수립에 관여했으며, 1947년 뉴욕시티 UN사무국의 신탁통치이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랠프 번치는 트뤼그베 리 사무총장의 요청을 받고 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에 합류했으며, 1948년 최고 중재담당관인 폴커 베르나도트 경이 암살되자 직무를 승계하고 1949년 2~5월 성공리에 휴전협상을 이끌어냈다.
1957년 정치담당 특별사무총장에 오른 랠프 번치는 다그 함마르시욀드 사무총장의 분쟁조정 활동을 보좌하게 되었고, 원자력의 평화로운 이용을 위한 UN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1956년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지대를 침공하자 6,000명의 중립군을 파견했으며, 1960년 콩고 위기가 발생하자 평화유지군을 조직했고, 1964년 키프로스와 터키 사이에 무력충돌이 야기되었을 때에는 직접 중립군 병력을 지휘했다.
1950, 1960년대에 걸쳐 흑인민권운동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국내의 비난여론이 팽배해지자 번치는 보다 직접적인 목소리로 정부의 인종차별정책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1965년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셀마와 몽고메리의 민권운동집회에 참석했으며, 22년 동안 유색인지위향상협회의 이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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