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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2,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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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 |
국적 | 한국 |
요약 언론인·문학가. 가난에 대한 남다른 관심,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썼다.
필명은 걱정업슬이·디시생(D. C. 生)·무우생·설원.
매동상업학교를 거쳐 1917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한 뒤 〈신문계 新文界〉·〈반도시론〉·〈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다.
범언론인단체의 성격을 띤 무명회 상임간사를 거쳐 친일단체인 조선협회 이사, 〈신천지 新天地〉 주간으로 있다가 1945년 8·15해방 후에는 우익신문인 〈대동신문〉 취체역(지금의 감사)·회장, 홍익대학교 신문학과 강사를 지냈다. 1923년 11월 〈일본위정자에게 여(與)하노라〉(신천지, 1923. 11)라는 글을 써서 6개월간 투옥된 적도 있으나 이는 일본의 정치공작일 뿐이며 민족언론활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족의 독립보다 문명개화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명개화지상론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독특한 세계를 형성했다.
가난에 대한 남다른 관심,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그의 소설은 1920년대 신경향파 소설의 전(前) 단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인물을 통해 문명개화를 주장한 〈삼십만원〉(신문계, 1917. 2)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낸 〈절교의 서한〉(신문계, 1917. 4)·〈양인의 기도〉(반도시론, 1917. 9) 등이 있다.
8·15해방 후에는 야담을 주로 썼는데 중국의 것이 아닌 한국의 것을 소재로 한 점이 특이하다. 야담집으로 〈한국야담사화전집〉(1962)·〈단편야담〉(196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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