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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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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02 |
국적 | 중국 |
요약
방효유는 송학을 계승한 학자이자 유명한 산문가였다. 그의 글은 문풍이 호방하고 온건하여 당시 사람들이 즐겨 암송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3세에 고문을 지었다.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집안의 자제로 10세 때 당대의 석학인 송렴에게 배우고 그 문하에서 제1인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처음 홍무연간(1368~98)에 주원장에게 2번이나 추천되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혜제 때 기용되어 한림원 시강에 임명되었다. 이어 시강학사에 추천되어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연왕 주체가 군대를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고, 방효유에게 등극의 조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그의 명령을 거절하여 영락제로부터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인 책형을 받았고 그의 일족 800여 명이 살해되었다. 영락제 시대에는 그의 문집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자는 희직·희고, 호는 손지(遜志)·정학(正學). 저장 성[浙江省] 영해현(寧海縣:지금의 샹산 현[象山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3세에 고문을 지었다고 하는데 문풍이 한유(韓愈)와 비슷하다고 하여 '소(小)한유'라고도 불렸다. 대대로 관료를 배출한 집안의 자제로 10세 때 당대의 석학인 송렴(宋濂)에게 배우고 그 문하에서 제1인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처음 홍무연간(1368~98)에 주원장(朱元璋)에게 2번이나 추천되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혜제(惠帝) 때 기용되어 한림원 시강(侍講)에 임명되었다. 이어 시강학사(侍講學士:후에 문학박사)에 추천되어 국정에 간여하게 되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 : 永樂帝)가 거병하여 제위를 찬탈하고, 방효유에게 등극의 조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그의 명령을 거절하고 "비록 10족이 주살되더라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요광효(妖廣孝)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의 학문이 씨가 말라버린다고 영락제에게 충고했으나, 결국 영락제는 그를 책형(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처자를 비롯하여 일족 800여 명을 살해했다.
방효유의 학문은 송학(宋學)을 계승했다. 유명한 산문가이기도 한 그는 문장이 간결하고 뜻이 확실하며, 생각을 솔직하게 서술했다. 문풍이 호방하고 웅건하여 당시 사람들이 즐겨 암송했다.
영락제 시대에는 그의 문집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손지재집 遜志齋集〉 24권, 〈방정학선생집 方正學先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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