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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아

다른 표기 언어 Vasco Núñez de Balboa
요약 테이블
출생 1475, 카스티야 엑스트레마두라 헤레스데로스 카바예로스 또는 바다호스
사망 1519. 1. 12, 파나마 다리엔 근처 아클라
국적 스페인

요약 발보아는 1511년 남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정착지 대표였고, 1513년 9월 25일(또는 27일) '다리엔 정상'에서 태평양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1500년 현재의 콜롬비아 연안 탐험대에 참여하여 히스파니올라에 정착했다. 1510년 그는 우라바 연안의 식민지 지원을 위해 조직된 탐험대에 다시 참여했다. 그의 충고에 따라 식민지의 생존자들은 파나마지협 연안 다리엔으로 이주하여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정착지를 세웠다. 1511년 12월 그는 임시 총독 및 다리엔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남쪽의 바다와 다량의 금 매장지역의 탐험을 위한 원정대 조직을 위해 스페인에 밀사를 보냈으나, 국왕은 다리엔 군사령관 및 총독으로 페드라리아스를 임명하여 원정대를 출발시켰다. 그는 원정대를 기다리지 않고 항해를 떠나 다리엔 정상에서 태평양을 발견했다. 그 후 다시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나 페드라리아스의 지배를 받다가 처형되었다.

1511년 남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안정적인 거주지에서 우두머리가 되었고, 1513년 9월 25일(또는 27일) '다리엔 정상'에서 태평양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중앙 아메리카).

신대륙에서의 활동

발보아는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연대기 작가인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오비에도 이 발데스에 따르면, 그의 아들들은 '고생없이 자란 좋은 집안의 아들'이었으며, 종종 인도에서 재산을 모으려 했다고 한다. 발보아는 1500년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와 함께 현재의 콜롬비아 연안을 탐험하는 항해를 떠났다. 후에 히스파니올라(아이티)에 정착했지만 개척농민으로 살지는 않았다. 그는 채권자들을 피해 1510년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엔시소가 조직한 탐험대에 밀항자로 참여했다. 이 탐험대는 현재의 콜롬비아의 우라바 연안에 알론소 데 오헤다가 세운 식민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끈 이 탐험대는 식민지의 생존자를 발견했으나 오헤다는 이미 죽은 뒤였다. 발보아의 충고로 거주민은 우라바 만을 건너 다리엔으로 갔다. 이곳은 파나마 지협의 연안에 위치한 곳으로 비교적 안전한 해안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산타마리아 데 라 안티과 도시를 세웠는데, 이는 남아메리카 대륙에 세워진 최초의 안정된 거주지였다. 그들은 그 지역 인디언과의 거래나 전쟁을 통해 금을 얻기 시작했다.

이 식민지 거주자들은 오헤다의 부사령관이었던 엔시소를 물러나게 하고 도시의회 선거에 들어갔다. 그 도시의 2명의 시장 중 한 사람이 발보아였는데 엔시소가 히스파니올라를 향해 떠났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식민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11년 12월 페르난도 국왕의 명령으로 임시 총독 및 다리엔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인도 지역의 금 채광 및 노예포획을 위한 탐험대를 조직했다.

대(對)인도 정책에 있어서 그는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강압적인 수단과 함께 물물교환과 정보제공자에 대한 포상 등을 병행했다. 또한 특정 부족과 동맹을 맺어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기도 했다. 당시 다리엔 인디언은 우라바 인디언처럼 호전적이지 않았고 독화살을 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스페인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못했으며, 스페인군이 도착하면 도망쳤다. 스페인군에는 사나운 전쟁견(戰爭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보아는 인디언 희생자를 찢어 죽이는 데에 이 개를 사용했다.

스페인인들은 남쪽의 바다와 한 지역에 무한히 많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디언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여기서의 바다는 태평양을 말하는 것이고 지역은 잉카 제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지역을 정복하려면 1,000명의 군사가 필요하다는 인디언의 말에 그는 서둘러 원조군을 요청하는 밀사를 스페인으로 보냈다. 그들이 보낸 소식은 본토의 스페인인들을 들뜨게 만들었으며, 즉시 대규모의 원정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그의 적들이 그를 비난하는 고발장을 왕에게 보낸 뒤로 페르난도 2세가 그를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다리엔 군대 사령관 및 총독으로 최고 권력을 가진 귀족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보통 페드라리아스라고 부름)를 임명했다.

2,000명에 달하는 원정대가 1514년 4월 스페인을 출발했다.

태평양의 발견

발보아는 원정대를 기다리지 않고 1513년 9월 1일 산타마리아에서 아클라로 항해를 떠났다.

아클라는 지협 중에서 가장 좁은 지역이었다. 그는 190명의 스페인인들, 수백 명의 인디언 짐꾼들과 함께 남쪽으로 지협을 건너 빽빽한 정글, 하천·습지 등을 통과하면서 안데스 산맥을 올라갔다. 1513년 9월 25일(또는 27일) '다리엔 정상에 조용히' 올라선 그는 그곳에서 태평양을 발견했다. 며칠 후 산미겔 만 연안에 도착한 그는 마르델수르(남해)를 정복했고, 그 주변의 영토를 카스티야 왕에게 바쳤다. 그는 지협을 다시 건너 1514년 1월 산타마리아에 도착했다.

그의 편지와 페드라리아스의 원정대를 맞아들이기 위해 다리엔으로 파견되었던 국왕 특사의 편지로 발보아가 '남해'를 발견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다시 왕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발보아는 마르델수르 및 파나마·코이바의 주(州) 총독(adelantado)으로 임명되었으나, 다리엔에 도착한 페드라리아스의 지배를 받았다. 이곳은 국왕 식민지로서 1514년 6월 카스티야 델 오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많은 충돌이 있었다.

게다가 병들고 성미가 까다로운 페드라리아스는 젊은 발보아를 질투했다. 다리엔의 초대 주교인 후안 데 케베도는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일시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화해의 표현으로 페드라리아스는 그의 딸 마리아와 발보아가 스페인에서 약혼하게 했다. 하지만 갈등의 소지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페드라리아스는 매번 발보아를 꺾으려고 정직하지 못한 정책을 폈으나 결국에는 마지못해 발보아의 남해 탐험을 허락하게 되었다.

발보아는 산맥을 가로질러 태평양 연안으로 운반된 재료들을 사용해서 배를 만들었으며, 그곳에서 1517~18년까지 산미구엘 만을 탐험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발보아는 직권을 남용하고 능력이 부족하다고 페드라리아스를 비난했고, 마침내 다른 이들도 페드라리아스가 총독에 적합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다리엔으로 새 총독이 올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새 총독은 페드라리아스의 업무상 행적을 사법적으로 재검토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졌다. 겁에 질린 페드라리아스는 발보아가 그곳에 있다가 증언을 한다면 자신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리라 생각하고 발보아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일상 문제를 의논한다는 구실로 발보아를 소환한 뒤 여러 악행 가운데 반란, 대반역죄, 인디언 학대죄 등의 책임을 물어 체포했다. 페드라리아스의 최고 법관인 가스파르 데 에스피노사가 주재한 재판에서 발보아는 유죄로 밝혀져 사형 선고를 받았고, 1519년 1월 4명의 동료들과 함께 목이 베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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