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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발루치어를 사용하는 부족.
Balochi, Beluchi라고도 씀.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주와 이란에 인접한 지역, 아프가니스탄·바레인·펀자브(인도) 지방에 약 400만 명이 살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이들은 술라이마니족·마크라니족 등 두 집단으로 나누어지고, 이 두 집단의 거주지역 사이에 브라후이족이 조밀하게 모여 살고 있다.
발루치족의 고향은 원래 이란 고원지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10세기경 아랍 역사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고대 부족조직은 술라이만 산맥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족장과 대립하는 씨족도 일부 있지만, 각 부족에 족장은 1명만 있는 것이 보통이다(투만). 발루치족은 전통적으로 유목을 했지만 점차 정착 농업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화되어가고 있다.
족장은 고정된 주거지를 갖고 있다. 마을은 진흙과 돌로 지은 집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덕 위에 돌로 벽을 쌓고 거적을 덮은 것이 일시적인 주거지 역할을 한다. 이들은 낙타·소·양·염소를 기르며 카펫과 자수품을 생산하고 있다. 농경방식은 원시적이며 종교는 이슬람교를 믿는다.
발루치족의 70% 정도가 파키스탄에 살고 있으며 20% 정도는 이란 남동부 인접지역에 살고 있다.
이 지역들은 이란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들로서 이는 부분적으로 거친 물리적 환경 탓이다. 예컨대 강우량은 적은 편이지만 비가 내릴 때에는 집중적으로 내리기 때문에 홍수와 심한 침식작용 등이 일어난다. 또한 1년 중 8개월 정도는 흑서가 계속된다. 바가에대(帶)와 밤푸슈트 산맥을 끼고 있는 이란의 발루치스탄 산맥이 동서로 오만 만(灣)과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에 교통이 매우 곤란한 형편이다.
이 지역의 중심부에는 지하수가 풍부해서 때로 마슈키드·쿠나리 강 등이 산골짜기를 타고 넓게 형성되기도 한다.
옛날에는 이란의 발루치스탄 산맥이 인더스벨리와 바빌로니아로 통하는 육로구실을 했다. 또한 이 지역은 헤로도투스에 의해 이크티오파기(Ichthyophagi:물고기를 먹는 사람)의 땅이라는 의미의 모크란(Mokran)으로 불리기도 했다.
BC 326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힌두쿠시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갔으며 BC 325년 돌아오는 길에는 이곳을 통과하다가 발루치스탄 내륙전역에서 물을 얻지 못하여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AD 11세기 셀주크 투르크가 케르만 지역을 침입한 사건을 계기로 발루치족이 동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셀주크의 지도자 카부르트는 약탈을 일삼던 발루치족 산악민인 쿠피치(쿠프)족에 대해 원정대를 파견했다. 발루치족을 점령한 뒤 셀주크 투르크는 인도와 교역을 활발히 하기 위해 사막을 통과하는 길에 감시탑, 물 저장시설, 대상들을 위한 숙소 등을 세웠다.
사파위 왕조의 통치기간(1501~1736) 동안 발루치족은 저항을 계속했다. 파르스의 지사인 모하마드 타키 칸은 마크란에서 신드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1740년 발루치족에 대패했다. 발루치스탄 서부지역은 19세기에 페르시아에 점령된 뒤 1872년 지역의 경계가 정해졌다. 이란 정부에 대해 지역민들이 저항한 데는 러시아와 영국 식민주의가 사주한 면도 있었다.
1910년 발루치족은 인도의 전화선을 끊었으며 공무원을 암살했다. 정부는 1970년대에 이 지역 주민들의 정착을 도왔으며 댐과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등 경제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의 와중에는 발루치족의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란 발루치스탄 중부지역의 야자나무들이 늘어선 오아시스에는 오렌지·석류·뽕나무·바나나 과수원들이 있다. 그밖에 곡물·담배·쌀·목화·사탕수수·인디고도 재배된다.
자헤단에서 차바하르 항까지는 도로로 이어져 있다. 파키스탄·자볼·테헤란까지 철도로 연결된 자헤단은 동서로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자헤단·이란·이란슈하르·자스크에는 공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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