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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열강의 미국 식민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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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776년에 미국을 구성한 최초의 13개 영국 식민지는 북아메리카에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럽 열강의 수많은 시도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식민주의). 모든 식민집단은 땅을 차지했고, 대부분 토착 인디언들한테서 생존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기술을 가르쳐준 인디언들은 대개 백인에게 동화되거나, 우세한 유럽 무기를 당해내지 못하고 쫓겨났다. 스페인인들은 1513년에 이미 플로리다에 상륙했고, 1540년에는 뉴멕시코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의 서인도회사는 1624년에 포르트오라녜(지금의 뉴욕 주 올버니)에 뉴네덜란드를 건설했다. 프랑스인들은 1673년에 광대한 미시시피 강 유역을 탐험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인들은 1741년에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버지니아

모든 식민지 이주자들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영국인이었다.

1607년에 영국인들이 세운 제임스타운은 북아메리카 최초의 항구적인 영국인 정착지로서, 버지니아 식민지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2차례 특허장을 얻어내 설립된 이 식민지는 설립 후원자인 버지니아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좋은 투자대상이 못 되었는데, 그 이유는 주로 초기 식민지 이주자들의 게으름과 만성적인 자본 부족 때문이었다. 이주자들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일조차 하려 들지 않았고, 자본 부족으로 인해 식민지개척에 나선 사람들에게 보급품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었다.

1612년에는 3번째 특허장이 나와 자본을 모으기 위해 복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식민지인들은 품종개량을 통해 담배를 경제성 있는 작물로 만들었다. 같은 무렵에 도입되어 시행된 새로운 윤리 규준은 실험단계에 있는 버지니아 식민지에 질서를 가져다주었지만, 새로운 개척자를 끌어들이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후에 이루어진 개혁으로는 새로운 정착민에게 50에이커의 땅을 주고(버지니아 식민지까지 오는 배삯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도착하자마자,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7년 동안 식민지를 위해 봉사한 뒤에), 1619년에 식민지 주민의 투표로 선출되는 하원을 창설한 것 따위를 들 수 있다.

1619년 네덜란드 선박 1척이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를 실어왔고 이로써 시작된 노예제도는 나중에 대농장농업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전염병, 인디언과의 전쟁 및 내부 분쟁 등에 시달리는 버지니아회사를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624년에 결국 식민지는 영국 왕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동안 불안정한 시기를 거친 뒤 식민지 하원의 역할은 상당히 늘어났다. 영국 왕은 또한 담배 재배와 수출에 진력하겠다는 버지니아 식민지 주민들의 결정을 마지못해 묵인했다.

1630년에 이르자 버지니아 식민지는 비록 번창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왕의 특별보조금을 받지 않고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매사추세츠에 플리머스를 건설한 개척자들은 국왕으로부터 식민지 특허장을 받지 못했지만, 버지니아와 마찬가지로 이윤을 추구하는 후원자들의 개인적인 투자에 식민지 재정을 의존하고 있었다.

이 정착촌의 핵심은 영국 교회에서 벗어나고자 네덜란드 레이덴으로 망명해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살다가 신대륙으로 건너온 영국 청교도, 즉 필그림(Pilgrim:순례자)들이었다. 이주 첫 해인 1620년에 개척자의 거의 절반이 병에 걸려 죽었다.

영국 투자자들의 지원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이주 첫 해의 고비를 넘긴 뒤부터 식민지 주민들의 건강과 경제상황은 날로 좋아졌다. 필그림들은 곧 주위에 사는 인디언들과 평화조약을 맺어, 방어보다는 경제발전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을 수 있게 되었고 불과 5년 만에 식민지는 자급자족 경제를 이룩했다.

필그림들은 플리머스에서는 줄곧 소수집단이었지만, 이주한 뒤 40년 동안 식민지 통치구조를 거의 지배했다.

필그림들 가운데 성인 남자는 그들이 타고 온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리기 전에 이 새로운 모험의 지도자들이 만든 법률과 포고령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서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이 메이플라워 서약은 미국 역사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해석되었지만, 다수에 대한 통제권은 여전히 윌리엄 브래드퍼드를 비롯해 이 서약서를 기초한 필그림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플리머스 주민들이 교회와 시정(市政) 문제에서 점차 스스로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660년 이후였다. 1691년 플리머스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 병합되었을 때쯤, 플리머스 정착민들은 이미 조용하고 질서있는 생활로 유명해져 있었다.

매사추세츠 만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플리머스에 정착한 필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본국의 종교적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그림들과는 달리 영국국교회에서 '분리'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몸소 모범을 보여 교회를 개혁하고 싶어했다. 매사추세츠 만 개척사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신대륙에서 종교적 관용의 전초기지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식민지를 '황야의 시온 산'으로 만들어, 즉시 교정을 받아야 할 배교자들에게 순결과 정통신앙의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식민지의 세속 정부도 이와 비슷한 권위주의 정신을 가졌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의 초대 총독인 존 윈스럽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의무가 사회 구성원들을 직접 대표하는 대리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치가 사회 전체에 가장 이로운가를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매사추세츠베이 식민지는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식민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정신이 발전했다.

코네티컷·로드아일랜드·뉴햄프셔

그러나 많은 뉴잉글랜드 정착민들은 매사추세츠의 지배집단이 강요하는 정통신앙에 따라 살기를 거부했고, 이런 불만의 부산물로 코네티컷(1635)과 로드아일랜드(1636)가 건설되었다.

뉴햄프셔와 메인의 정착민들도 역시 초기에는 매사추세츠 식민지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뉴햄프셔는 1692년에 매사추세츠에서 영원히 떨어져 나갔지만, 메인은 1820년까지 매사추세츠의 관할권 안에 남아 있었다.

메릴랜드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메릴랜드는 영국 식민지 가운데 한 사람의 영주(領主 proprietary)가 지배한 최초의 땅이었다(영주식민지). 볼티모어 경 조지 캘버트는 숱한 식민지 설립 계획에 투자하다가, 1632년에 국왕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았으며 영국 법률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 한, 식민지의 무역·정치 체제를 통제할 수 있었다.

메릴랜드 식민지는 적어도 2가지 목적을 가지고 건설되었다. 가톨릭교도인 볼티모어 경은 가톨릭교도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식민지 건설을 꿈꾸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가 되도록 많은 이익을 자신에게 가져다주기를 열망했다. 그의 토지정책은 소수파인 가톨릭교도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캘버트 가문은 신교도인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이 영국을 다스리던 시기에 잠시 식민지 소유권을 잃었지만,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영국국교회에 귀의한 뒤 소유권을 되찾았다.

캐롤라이나

영국 왕은 1629년에 이미 캐롤라이나 지역에 대해 식민지 설립 특허를 부여했지만, 8명의 영주가 이 지역을 실제로 식민화하기 시작한 것은 1663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식민지가 상당한 성장을 이룩하기까지는 다시 50년이 걸렸다. 캐롤라이나는 두 부분으로 성장했다. 북부지역은 지형이 험한 해안선 때문에 유럽이나 카리브 해와 무역이 거의 막혀 있었던 만큼 거기서는 중소 규모의 농장이 발전했고, 카리브 해나 유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부지역은 쌀을, 그리고 나중에는 인디고를 생산해 세계 시장에 수출했다. 1729년 캐롤라이나는 노스캐롤라이나사우스캐롤라이나라는 2개의 왕령(王領) 식민지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주로 영주들이 긴급한 방어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뉴욕·뉴저지·델라웨어

영국은 1664년에 뉴네덜란드 식민지(지금의 뉴욕·뉴저지·델라웨어 주로 이루어진 지역)를 빼앗았다.

이 지역은 찰스 2세의 동생인 요크 공 제임스의 이름을 따서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요크 공의 영주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요크 공의 노력은 인디언과 외국인 침입자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탈세 때문에 대부분 좌절되었다. 요크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르자, 뉴욕의 지위는 영주 식민지에서 왕령 식민지로 바뀌었다. 그후 뉴욕이 뉴잉글랜드의 식민지들과 통합되자, 이미 지배귀족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주민들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으로 통합은 무효가 되었지만, 국왕의 지배는 더욱 엄격해졌다.

펜실베이니아

펜실베이니아는 어느 정도는 설립자인 윌리엄 의 관대한 정책 덕분에, 북아메리카의 모든 식민지 가운데 가장 다양하고 활기차며 번영하는 식민지로 성장했다.

양심의 자유와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퀘이커 교도이자 휘그당원인 윌리엄 펜은 찰스 2세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1681년 찰스 2세한테서 상환금 대신 델라웨어 강 연안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는 기본권 헌장을 여러 번 제정하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번번이 좌절하다가, 1701년 마침내 대의재정부를 수립하고 모든 신교도에게 종교적 관용의 원칙을 보장하는 기본권 헌장을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지역의 땅은 비옥했고 식민지 정부가 관대한 토지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펜실베이니아로 들어오는 이민의 수는 18세기 내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땅에 굶주린 유럽 이주민이 계속 들어오자, 초기에 윌리엄 펜이 마련한 평화적인 인디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유럽 이주민들의 '경제적 기회'는 그들보다 먼저 땅을 차지한 인디언 주민들을 몰아내거나 때로는 완전히 몰살하는 데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지아

13번째 식민지는 1732년 제임스 오글소프와 영국 젠트리 계급의 부유한 사회사업가들이 세운 조지아였다.

오글소프의 계획은 빚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갇힌 채무자들을 조지아로 이송해 이들의 힘으로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죄수들이 유익한 노동을 함으로써 사회에 복귀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식민지 소유자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조지아에 정착한 사람들(그들 모두가 가난한 채무자들은 아니었음)은 매우 억압적인 사회·경제 체제에 부딪혔다.

재산과 상속 및 개인 행동에 관한 규제는 진취적인 성향을 가진 일부 정착민들과 영주들 사이에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 게다가 경제는 식민지 투자가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영주들의 정책에 대한 항의가 거세지자, 1752년 영국 왕은 이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후 개척자들이 반대한 많은 제약들, 특히 노예제를 금지하는 규정 등이 폐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의 세계 열강의 식민지

ⓒ Aris Katsaris/wikipedia |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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