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요약
문헌상으로는 강릉·강성·개령·능성·단성·보령·선산 등 130여 본이 전하나 감천·정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평 문씨의 분파이거나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남평 문씨의 시조인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의 사람으로 〈조선씨족통보〉에 전설이 전한다. 1098년 좌복야에 이른 익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남평문씨의 분파는 합문지후공파와 순평부원군파로 나뉜다.
합문지후공파는 다시 후식의 8세손을 파조로 하여 충혜공파, 강성군파, 감천파로 나누어졌다.
남평문씨의 감천파와 조상이 다른 감천문씨와 정선문씨는 중국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문씨를 사성받아, 성씨를 열었다고 한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23위이다.
문헌상으로는 강릉·강성·개령·능성·단성·보령·선산·안동·영산·장연·하양 등 130여 본이 전하나 감천·정선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남평문씨의 분파이거나 세거지로 알려져 있다.
남평문씨의 시조인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의 사람으로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에 그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미동부리 동쪽에는 장자지라는 못이 있고 그 주변에 높은 바위가 있었다. 하루는 자비왕이 그 바위 아래에서 놀다가 위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올라가 보니 바위 위에 석함이 놓여 있는데 그 속에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이를 신비롭게 생각한 자비왕이 갓난아이를 거두어 길렀는데, 5세 때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에도 뛰어났다. 이에 자비왕은 갓난아이의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으로 칭했다 한다.
다성은 나중에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졌다고 하나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성 이후 세계는 확실하지 않아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 선종 때 좌승선 겸 어사대사를 지내고 1098년(숙종 3) 급사중승이 되어 이듬해 원자의 책봉을 청하려고 요나라에 다녀와서 좌복야에 이른 익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남평문씨의 분파는 익의 손자인 극겸의 두 아들 후식·유필을 파조로 합문지후공파와 순평부원군파로 나뉜다.
합문지후공파는 다시 후식의 8세손을 파조로 하여 익겸의 후손이 충혜공파, 익점의 후손이 강성군파, 구(龜)의 후손이 감천파로 나누어졌다. 순평부원군파도 유필의 8세손을 파조로 하여 송수의 후손이 파주파, 찬의 후손이 이성파, 맹돈의 후손이 필천파, 맹용의 후손이 영암파, 맹화의 후손이 영보파, 맹덕의 후손이 서흥파, 성의 후손이 대현파, 함의 후손이 이사파, 전의 후손이 남계파, 규(珪)의 후손이 고성파, 찬의 후손이 창원파, 노(璐)의 후손이 고품파, 겸의 후손이 오곡파, 필(弼)의 후손이 광릉파, 우의 후손이 지례파, 극충의 후손이 심묘파, 극정의 후손이 구정파, 유지의 후손이 천곡파로 나누어졌다.
남평문씨의 감천파와 조상이 다른 감천문씨는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인 김고벽(金高襞)이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문씨를 사성받았고, 그의 아들인 원길이 우리나라에 와 낭장이 됨으로써 감천문씨를 열었다고 한다. 정선문씨의 시조인 문임간은 원래 전씨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장을 떨침으로써 문씨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고려 예종 때 참지정사를 지낸 그의 아들 관(冠)을 중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13만 2,811호와 인구수 42만 6,927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23위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성씨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