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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 7. 30, 잉글랜드 요크셔 캐슬퍼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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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6. 8. 31,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머치해덤 |
국적 | 영국 |
요약 영국의 조각가.
개요
헨리 무어는 20세기 인문주의 조각의 전통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는 유기적이며 추상적인 형태의 인물상(像)으로 유명하다.
청동과 돌로 만들어진 이 작품들은 대부분 그 규모가 기념비적이며, 특히 일련의 누워 있는 나체상 연작이 잘 알려져 있다. 주문받아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파리 유네스코 본부(1957~58), 뉴욕 시 링컨 센터(1963~65),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1978) 등에 세워진 것들이 있다.
초기생애
헨리 무어는 잉글랜드 북부의 리즈 근처 작은 탄광 마을에서 아일랜드 혈통의 링컨셔 출신인 레이먼드 스펜서 무어와 영국 중부 스태퍼드셔 출신 메리 베이커 사이에서 일곱째 자녀로 태어났다.
헨리 무어의 아버지는 독학으로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조합주의자가 된 광부였다. 무어는 1909~15년에 캐슬퍼드그래머스쿨의 장학생으로 공부하면서 미술교사 앨리스 고스틱으로부터 많은 도움과 격려를 받았다. 어린시절부터 조각가의 꿈을 키운 무어는 우선 아버지의 소망에 따라 사대(師大) 과정을 밟고 몇 달 동안 교생실습을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1917년 2월 영국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헨리 무어는 1917년 여름 프랑스에 파병되었고 그해말에 캠브레 지구로 전속되었다. 그곳에서 집중적인 가스탄의 폭격으로 쓰러져 영국으로 후송되었고, 2개월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완쾌되었다. 1919년 9월 제대하면서 예비군이 되자, 리즈 미술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했다. 처음 1년 동안은 대부분 드로잉에 몰두했고,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새로 부임해온 조각 전공 교수의 첫 학생이 되었다.
얼마 후 근처 웨이크필드 출신의 바바라 헵워스가 들어와 함께 공부했는데, 그녀도 나중에 뛰어난 조각가가 되었다.
헨리 무어는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서 마이클 새들러(리즈대학 부총장)가 소장한 현대 회화들을 보고 자극을 받기도 했다. 2학년말 조각 시험에 합격한 뒤, 런던의 왕립미술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아 1921년 9월부터 조각 과정을 더 공부했다.
그곳에서 2년 후에 학위를 받은 뒤, 1년간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헨리 무어는 후에 이 대학의 학장 윌리엄 로선스타인과 친분을 맺고 일생 동안 그의 후원을 받게 되는데, 학장은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나 현대 미술 경향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무어는 학교에서보다 런던의 박물관, 특히 고대 조각품을 광범위하게 소장하고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혼자 작품연구를 하며 더 많은 것을 터득했다. 또한 가까이에 있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에서 오귀스트 로댕의 뛰어난 조각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 무어는 이미 유럽의 조각 전통에 거부감을 느끼면서 원시 미술과 고고(考古)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집트와 에트루리아의 조각,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미대륙 조각, 아프리카의 조각 등이 지닌 신비한 힘과 독특한 아름다움을 깨달아갔다.
여행 및 다른 예술 경향들에서 받은 영향
1924년 왕립미술 칼리지를 졸업하고 7년간 조소과 강사로 지낸 헨리 무어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미 비범한 재능과 잠재력을 인정받았다.
1925년 여행장학금을 받아 6개월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으며, 1926년 영국으로 돌아와 누워 있는 여인상을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여성의 반신상, 모자상(母子像), 마스크, 두상 등의 돌조각도 만들었다. 일부 작품들에서는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입체파 조각가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엿보이지만, 그당시 헨리 무어의 작품에 가장 영향을 끼친 것은 고대 멕시코의 돌조각이었다.
헨리 무어는 파리의 트로카데로 박물관에서 비의 정령을 뜻하는 마야의 석회석상(像)인 〈차크 물 Chac Mool〉을 본뜬 석고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무릎은 바싹 끌어당기고 뚫어지게 바라보는 얼굴은 몸과 직각을 이루고 있으며, 두 손으로 배 위에 얹어놓은 평평한 제물용 접시를 잡은 채 누워 있는 남자 형상의 이 조각에 매료된 무어는, 거기서 다른 어느 돌조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힘과 감수성, 깊이감, 독창적인 형태 등을 간파했다.
헨리 무어는 틀에 박인 미의 기준을 경멸하며 고대 마야의 돌조각이 지닌 특성들을 자신의 작품에서 구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고대 멕시코의 남자 형상을 여자 형상으로 바꾸어 제작했는데, 이는 좀더 인간적이고 자연적이며 율동감 넘치는 그의 독특한 형상을 표현해내기에 더 적절했다.
1928년 런던의 워렌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또한 처음으로 공공기관의 의뢰를 받아 런던 교통국의 새 본관을 장식할 〈북풍 North Wind〉이라는 부조를 제작했다.
1929년에 헨리 무어는 왕립미술 칼리지 회화과 학생인 러시아계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리나 라데츠키와 결혼해서 런던 북부 햄스테드에 커다란 작업실을 얻어 이사했다. 이무렵 무어는 1933년에 '유닛 원'(Unit one)이라는 단체를 결성한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다.
현대 미술과 건축 분야의 국제적인 동향을 무관심한 영국 대중에게 전파하는 데 주력한 이 단체는 화가인 폴 내시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바바라 헵워스와 그녀의 남편인 화가 벤 니콜슨이 지도적 역할을 했다. 그밖에 시인이자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가 회원들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는데, 그는 1934년에 최초로 헨리 무어에 대한 작가론을 썼다.
1930년대의 업적
1930년대초 영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예술활동을 벌여온 유닛 원 회원들은 추상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는 추상미술을 극단주의 미술 경향의 최종 결과로 여기던 때였다.
1931년부터 헨리 무어는 인물상 조각을 잠시 그만두고 인물상에 추상형태들을 결합하는 실험을 했다. 런던에 있는 레스터 화랑에서 마련한 수많은 무어 개인전 중 첫번째 전시회가 1931년에 열려 조각가 제이콥 엡스타인이 열렬히 작품 소개를 했지만, 언론의 혹평을 받아 무어는 악명높은 인물이 되고 만다. 결국 무어는 왕립미술 칼리지에서 사임 압력을 받았고, 1932년 계약기간이 끝나자 첼시 미술학교에 조각과를 개설하기 위해 떠났다.
1930년대 헨리 무어는 대중의 호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 활동을 했다.
파블로 피카소의 매우 조각적인 1920년대말 드로잉과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전보다 더 과격하게 인체의 형태를 왜곡시키고 부숴뜨리는 작업을 자유롭게 시도했다. 때로는 인간의 형상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기의 헨리 무어의 스케치북을 보면, 순수한 기하학적인 형태보다는 오히려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형태의 추상조각에 대한 깊은 관심을 알 수 있다. 무어는 자갈과 바위, 조개껍질, 뼈 등을 모아 스케치하고 연구해 얻어낸 이른바 '형태와 리듬의 자연법칙'에 따라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특히, 이를 계기로 움푹 팬 형태나 심지어 투각형 조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조각들이 인물상을 강하게 연상시키게 되자 대중들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변화들
전쟁이 터지면서 첼시 미술학교가 런던에서 철수하자 헨리 무어는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그후 주로 켄트 별장에서 작업하다가 그곳이 공격당하기 쉬운 채널 해안에 가까이 있어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무어 부부는 하트퍼드셔 머치해덤의 페리그린에 집을 얻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그들은 런던에서 북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이 조용한 시골의 낡은 농가에 점차 작업실과 방들을 늘려갔다. 전쟁 초기에는 재료 부족으로 주로 작은 작품을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뒤에는 드로잉만 했다. 1940년 9월 어느날 밤 런던 시민들이 지하철 역으로 대피하는 것을 보고 대피소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해 밤새 작은 스케치북을 가득 채웠다.
이것들은 훗날 화실에서 제작된 채색 소묘 대작들의 기초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쟁의 폭격으로 체념하면서도 꺾이지 않는 런던 시민들의 정신이 영구히 보존되어 있다. 또한 헨리 무어의 아버지가 일했던 요크셔, 캐슬퍼드에 있는 탄광을 찾아가 작업중인 광부들을 소묘로 그렸는데, 이것들도 '대피소 스케치'에서 느낄 수 있는 힘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 그후에는 스톤헨지, 코끼리 두개골, 양들을 소재로 드로잉을 했다.
1943년 헨리 무어는 노샘프턴의 세인트매튜 교회로부터 〈성모와 아기예수 Madonna and Child〉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 작품을 통해 종교미술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다고 느끼고 평범한 '모자'(母子) 개념에서 사라져가는 '엄격함과 고귀함 및 일종의 장엄(심지어 신성한 초연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또 1944년 의뢰받은 가족 군상의 제작을 통해 헨리 무어의 양식은 1930년대의 실험적인 형태에서 직접 대중에게 호소하는 좀더 자연주의적인 형태로 극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무어는 이 두 작품을 위한 제작과정에서 수십 가지의 점토와 테라코타 습작들을 만들었는데, 한 형태로 7~9개의 청동 복제품이 만들어져 전세계 미술관과 수집가들이 쉽게 소장할 수 있었다.
헨리 무어는 194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에서 이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이로 인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곧이어 미국의 수집가들이 헨리 무어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재정 형편이 좋아지면서 자신이 원하는 규모로 조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조각 부문에서 상을 타면서 무어의 명성은 유럽에서도 입증되었고, 영국에서 작품의 범위와 규모를 늘린 여러 점의 주문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 가운데 1948년과 1954~55년 신도시에 세워진 〈가족상들〉(하트퍼드셔의 스티버니지, 에섹스의 할로 소재), 돌조각 〈옷을 걸치고 서 있는 세 인물 Three Draped Standing Figures〉(1947~48, 런던 배터시 공원 소재), 〈성모 Madonna〉(1949, 서퍽 클레이던에 있는 세인트피터 교회 소재), 대영제국 축제를 위해 만든 거대한 〈누워 있는 인물 Reclining Figure〉(1951) 등이 있다.
1944년 헨리 무어의 어머니가 죽고 1946년 외동딸인 메리가 태어나면서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의 몇몇 주요작품들에서는 가족, 특히 모자관계의 주제가 좀더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후기생애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평가들은 혁신적인 조각가 헨리 무어가 활기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바로 그해 발표된 거칠고 모난 투각형의 위협감을 주는 청동입상들을 보고 잘못된 생각임을 확인했다.
헨리 무어는 1953년 여름, 병을 앓게 되면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특히 개인적인 관심사를 실험하고 추구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1957~58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세워진 거대한 대리석상은 〈누워 있는 여인〉 연작 중 하나이지만, 1955년 로테르담의 보우센트룸(Bouwcentrum)의 벽돌 부조상에서는 생물 형태적 형상을 재도입해 만들었고 이것은 1955~56년 토템의 직립 조각상들로 이어졌다.
1950년대에는 〈왕과 왕비 King and Queen〉(1952~53)·〈방패를 든 전사 Warrior with Shield〉(1953~54)·〈쓰러지는 전사 Falling Warrior〉(1956~57)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 작품들은 헨리 무어가 남자형상을 이용한 드문 예들로 1951년 그리스의 아테네·미케네·델포이를 처음 방문하고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무어는 주로 청동상 제작에 몰두했으며 나무와 돌로 조각한 작품도 계속 만들었다. 청동상 제작과정에서 무어는 점토모형 대신 처음부터 철사와 나무틀에 석고를 입혀 나가면서 원형을 만들었다.
헨리 무어는 언제나 자르고, 긁고, 표면을 문질러대는 등의 조각공 같은 작업방법을 선호했다.
1958년 60세가 되면서부터 헨리 무어는 현대 조각가로서의 공적 임무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에 더욱 기울어졌다. 무어는 1963~65년의 링컨 공연예술 센터를 위한 작품과 1964년 시카고대학교를 위한 작품 등 계속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이 두 경우 모두 장소에 맞춰 작품을 제작한 예전과는 달리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그가 상상해온 대규모 조각상을 만들었다.
링컨 공연예술 센터에 세워진 가장 큰 〈누워 있는 여인〉은 인체와 벼랑, 동굴, 비탈진 언덕 등과 같은 풍경 요소들 사이의 상징적 조화 및 유기체, 특히 인간과 동물의 뼈와 인체 사이의 상징적인 조화를 착안해 만든 작품이다. 꼭대기에 버섯구름 모양으로 원자 분열을 나타내는 〈원자 조각 Atom Piece〉(시카고대학교 소장)은 1960년대의 다른 대규모 추상조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일련의 추상조각들인 〈맞물린 조각 Locking Piece〉(1963~64)·〈세 방향의 조각 1:정점 Three-way Piece No. 1:Points〉(1964)·〈2개의 칼날 Knife-Edge Two-Piece〉(1962)·〈3가지로 구성된 조각 3:척추 Three-Piece Sculpture No. 3:Vertebrae〉(1968)는 모두 엄청난 크기로 인해 전혀 인간의 형상을 연상시키지 않는다.
헨리 무어는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일부 추상조각들을 청동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기도 했다. 1965년부터 무어는 카라라 채석장 근처 포르테데이마르미에 여름 별장을 얻어 이탈리아인 조수를 두고 다시 돌조각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헨리 무어는 케임브리지와 하버드, 옥스퍼드 등 많은 대학교에서 명예학위를 받는 등 큰 명예를 얻었다. 1955년에는 명예훈장, 1963년에는 메리트 훈장을 받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과의 유대를 잃지 않고 광부와 농장 노동자인 무어의 선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솔직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헨리 무어는 수수하게 살았으며, 2~3명의 젊은 조각가들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요하는 그의 조각일을 도왔다. 무어의 80회 생일을 기념해 그가 태어난 요크셔 브래드퍼드에서 첫 대규모 작품전시회가 열렸으며,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서는 무어가 수년에 걸쳐 기증했던 36점의 조각품을 전시했다. 머치해덤에 있는 무어의 집과 토론토에 있는 헨리 무어 조각 센터에 그의 작품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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