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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 10. 28, 경남 밀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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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6. 6. 30, 서울 |
국적 | 한국 |
요약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져있으며,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일본 유학시절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과 바이올린, 기타 등 악기 연주를 익혔다. 우라타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등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고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군국주의에 부응하는 음악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분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비내리는 고모령>, <굳세어라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 있다.
초기 생애
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9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느라 가산이 소진되어 곤궁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 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1929년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1935년경부터 박시춘이라는 예명으로 작곡을 발표했는데, 1938년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 참여할 때는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보이즈'라는 남성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했으며, 일제말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악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2년부터 <고성의 달>, <아들의 혈서>, <아세아의 합창>, <결사대의 아내>, <혈서지원> 등 일본 군국주의에 부응하고 조선인의 지원을 고무하는 군국가요를 작곡하고,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전시물자 증산을 위한 산업전사격려위문예능대 등에서 활동하는 등의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되었다.
해방 후 활동
해방 후에는 한국방송공사(KBS)의 경음악단을 이끌면서 방송가요와 영화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1958년에는 영화음악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영화제작도 했으며 〈육체의 길〉과 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다.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1961),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65년 이후로는 창작활동을 중단했으며, 1982년에는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았다.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작품들에는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첫 히트곡〈애수의 소야곡〉 외에 〈가거라 38선〉·〈럭키 서울〉·〈비내리는 고모령〉·〈전선야곡〉·〈굳세어라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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