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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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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52. 6. 26, 경남 산청

요약 1972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유신체제'로 불리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운동을 넘어 재야 운동권에서 활동했다. 1986년 5·3인천항쟁 등 직선제 개헌운동을 주도했다.
1991년부터 정치에 참여해,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5년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실을 폭로했으며, 검찰 수사에 의해 노태우가 구속되었다. 박계동은 시국강연회를 여는 등 사전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이후 정치권에서 벗어나 있다가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박계동(朴啓東)

14대,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였으며 현재 한국택시협동조합의 이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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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동은 1972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음 투옥되었다. 이때의 투옥을 계기로 그는 이른바 '유신체제'로 불리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운동을 넘어 재야 운동권에서 활동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대변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조직국장 등을 거치면서, 1986년에는 5·3 인천항쟁 등 직선제 개헌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991년부터 정치에 참여했다. 그는 야권통합추진위원회 위원으로 당시 평민당과 민주당의 통합에 기여했고, 1992년 4월 14대 총선에서 서울 강서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등원 첫해 '한준수 전 충남 연기군수 관련, 부정선거 폭로사건'을 이끌어냈다. 한준수 전 연기군수의 폭로는 여야간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고, 오랜 기간 정국 대치상황을 낳았다. 마침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관권선거 방지책을 요구하는 야당의 압력과 여론에 못 이겨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내각을 선언했다. 1995년 10월 그는 국회 대정부 질의를 통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실을 폭로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지시했고, 검찰 수사는 노태우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박계동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패배한 후 통합민주당과 신한국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는 시국강연회를 여는 등 사전선거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이로 인해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2000년 16대 총선RJ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그는 정치권에서 벗어나 있다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송파구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공천에서 떨어져 출마하지 못했으나 국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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