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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로마의 귀족가문.
원래 엘세 강 유역의 바르베리노 출신인 이 가문은 처음에는 피렌체에 정착했다가 뒤이어 로마에 정착하면서 부유하고 권세있는 가문이 되었다. 안토니오 바르베리니는 1530년에 피렌체를 방어했으며 뒤이어 로마로 가서 1555년 바르베리니 가문의 실질적 창시자인 조카 프란체스코(1528~1600)를 그곳으로 불렀다. 프란체스코와 그 동생 라파엘로는 바르베리니가의 권력기반이 된 재산 및 무역 이권을 축적했다.
프란체스코(1597~1679)는 1623년 10월 숙부인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처음으로 추기경에 지명되었다. 우르바노가 추기경으로 지명한 가문의 2번째 사람은 자신의 동생인 대(大)안토니오(1569~1646)로서 대안토니오는 로마의 종교 건축물 건립을 장려한 인물로 유명하다. 우르바노의 조카인 소(小)안토니오(1607~71)는 1628년 이 가문의 3번째 추기경이 되었고 유능한 협상가로 알려져 우르바노(1631)와 아비뇽(1633)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외교사절 임무를 위임받았다. 예술의 후원자였던 그는 특히 바로크 조각가이며 건축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를 후원했다. 또한 방대한 분량의 도서를 수집했는데 그의 장서는 그가 죽고 난 뒤 형인 프란체스코의 대규모 도서실로 옮겨졌다.
바르베리니 가문은 곳곳에서 증오를 샀고 몇몇 세도가문과 분쟁에 휩쓸렸다. 특히 파르네세 가문은 바르베리니 가문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규합해 1644년 3월 30일 라고스쿠로에서 바르베리니 가문을 패배시켰다. 이 패배와 더불어 우르바노의 죽음으로 바르베리니 가문의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새로 교황에 선출된 인노첸시오 10세(1644~55 재위)가 바르베리니 가문의 교회공금 유용혐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 타데오·프란체스코·소안토니오는 파리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프랑스의 추기경 쥘 마자랭의 비호를 받으면서 안락한 생활을 누렸다. 마자랭의 도움과 더불어 타데오의 아들 마페오와 인노첸시오의 수양딸인 올림피아 주스티니아니의 결혼을 계기로 바르베리니가는 1653년 인노첸시오와 화해했다. 타데오는 파리에서 죽었으나 프란체스코(1648)와 안토니오(1653)는 로마로 돌아와 베르니니의 감독 아래 지은 로마의 웅장한 바르베리니 궁정에서 살았다. 바르베리니 가문은 타데오의 딸 루크레치아를 모데나 공작인 프란체스코 2세와 결혼시킨 것을 비롯해 주로 현명한 결혼정책을 방편으로 삼아 한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바르베리니 가문은 1736년에 소멸했으며 그 영지는 콜론나 가문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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