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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넘

다른 표기 언어 P(hineas) T(aylor) Ba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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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10. 7. 5, 미국 코네티컷 베설
사망 1891. 4. 7, 코네티컷 브리지포트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유명한 흥행사. 순회서커스와 광고홍보계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이색적인 풍물과 인물을 전시하는 전시사업으로 출발, 음악연주회와 서커스의 순회공연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생애 후반에는 정치에도 진출, 노예해방과 인종차별 반대에도 앞장섰다. 그의 생애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이 2017년 개봉되었다.

개요

미국의 흥행사. 이색적인 전시회·음악연주회·서커스와 같은 오락활동을 획기적으로 널리 대중에게 전파하는 흥행사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제임스 A. 베일리와 동업하면서 그는 미국의 서커스를 이른바 '지상 최대의 쇼'로 불리는 인기있는 구경거리로 만들었으며, 대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간파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천부적인 재질을 보였다.

바넘(Phineas Barnum)

미국의 엔터테이너, 기업인, 쇼맨이다.

ⓒ Everett Historical/Shutterstock.com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초기 생애

바넘의 증조부는 소매업을 하면서 전국적인 복권 사업을 창안했던 인물이었다. 바넘의 아버지 필로 바넘(Philo Barnum)은 소매업과 양복점을 했으나 1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바넘이 어머니와 다섯 동생들을 부양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끝에 코네티컷 주의 댄베리에서 〈헤럴드 오브 프리덤(Herald of Freedom)〉이라는 주간신문의 발행자가 되었다. 신문기사로 인해 3번이나 명예훼손죄로 고소되기도 했지만 덕분에 그는 최초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829년 19세 때 바넘은 베설 출신의 21세의 체리티 핼레트(Charity Hallett)와 결혼하여 4명의 딸을 두게 되었다.

흥행사업 진출

1834년에 뉴욕시로 이사한 바넘은 그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흥행사라는 직업에 뛰어들었다. 1835년 그는 조이스 헤스라는 늙은 흑인 여인을 조지 워싱턴 장군의 161세 된 간호원이라고 선전하여 쇼에 출연시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인간유물은 곧 그의 속임수였던 것으로 폭로되었다. 한편 뉴욕 시에 있는 존 스커더의 아메리카 박물관 경매에 응찰한 바넘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더 부유한 경매인들을 물리치고 인수하게 되었다.

박물관은 5층의 대리석건물로 박제동물이나 밀랍조각, 유사한 일반 전시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는 희한한 생물들의 전시회, 연극제, 미인대회 및 기타 획기적인 흥미거리들의 기획전으로 용도를 급속히 바꾸었다. 비록 부와 명성을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바넘에게 이 새 사업은 단순한 이기적인 동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는 후일 "이 세계는 교환의 세계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구상에서 홀로 살 수 없는 한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좀더 즐겁게 보낼 무엇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사람 역시 신이 만들어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색 박물관 경영

대중들은 희귀하고 기괴한 것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던 바넘은 이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진실성 여부를 제쳐둔 채 죽은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이든 모든 신기한 것들을 찾아다녔다. 멋진 묘기와 반복적인 광고, 과장된 선전으로 그의 놀라운 쇼는 관심을 불러모으는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1842년 아메리카 박물관을 인수하여 1868년 2번의 화재로 그것이 거의 파괴될 때까지 바넘은 화려한 쇼맨십으로 아메리카 박물관과 기타 사업에 8,200만 명의 관객을 유치했다. 그 가운데는 헨리 제임스와 윌리엄 제임스, 찰스 디킨스, 웨일스의 왕자였던 에드워드 7세 등이 있었다.

바넘이 박물관에 전시한 것 가운데 최초의 성공작은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몸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피지 인어였는데, 물론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또한 실물로서 호기심을 끈 것은 장과 엉 쌍둥이 형제였는데 이들은 가슴뼈 아래가 서로 인대로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 준것은 63.5cm 키를 가진 난쟁이 찰스 S. 스트래턴이었다. 그는 난쟁이를 톰 섬 장군이라고 요란스럽게 선전하여 2,000만 장의 입장권을 팔았다. 링컨 대통령을 접견한 후 바넘과 톰 섬은 자축 해외여행을 했는데, 여행 도중 톰 섬은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제니 린드 순회공연

단순한 희귀·흥미거리의 흥행사에서 문화예술의 흥행주로 이미지 변신에 열중한 바넘은 미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조차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스웨덴의 소프라노 가수 제니 린드(Jenny Lind, 본명은 Johanna Maria Lind)를 초청하는 데 그의 전재산을 거는 모험을 했다. 린드에게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별명을 붙여 지금껏 선전한 어떤 것보다도 더 크게 광고를 했다. 1850년 5,000명의 청중이 관람한 뉴욕에서의 첫 공연을 마친 후 9개월에 걸친 미국 전역의 순회공연을 통해 그는 거액의 돈을 벌어들였다.

'사기의 왕자'

전성기의 바넘은 그가 주최한 전시회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이었다. 188cm의 키, 반쯤 벗겨진 머리, 푸른 눈, 주먹코, 올챙이배의 인상적인 모습을 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사기의 왕자'라고 불렀다. 코네티컷 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6만 8,794㎡의 대지 위에 '이라니스탄'이라는 이름의 3층짜리 동양식 저택을 소유했던 그는 마크 트웨인, 호리스 그릴리, 매슈 아놀드와 같은 저명한 인사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가까운 친구들은 그에 대해 심성이 착하고 사려 깊으며 친절한 반면, 인색하고 이기적인 일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순회서커스단 설립

그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서커스와 연관되어 있지만 바넘이 서커스의 흥행사로 손을 댄 것은 60세가 넘어서였다. 그는 순회 서커스단의 흥행가능성을 예측하고, 후일 '링링 브로스 앤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Ringling Bros. and Barnum & Bailey Circus)'이라고 명명된 이동식 서커스 공연단을 1870년대에 설립했다.

바넘이 현대적인 서커스를 개발한 것은 아니지만 은퇴하여 경험이 많은 제임스 A. 베일리와 함께 미국식 쇼인 서커스를 거대한 규모로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폭넓게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지상 최대의 쇼'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는 무게가 6.5t이나 나가는 '점보'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구입하여 그의 화려한 경력 위에 서커스라는 또 하나의 경력을 추가하게 되었다. 이 '점보'는 서커스 공연 첫 시즌중 이미 구매비용을 회수할 수 있을 만큼 큰 돈을 벌게 해주었다.

정치 입문

흥행사라는 직업 외에 그는 정치와 집필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2번에 걸쳐 코네티컷 주의회 의원직을 역임한 후 브리지포트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시장직을 수행하면서 매춘과 흑인에 대한 차별대우에 반대했다. 1885년에 자서전 〈바넘 자신이 쓴 그의 생애(The Life of P. T. Barnum, Written by Himself)〉를 출판했는데, 책 속에서 그는 과거에 자신이 행한 사기성 행위 일부를 솔직히 기록했기 때문에 다수의 비판자들이 그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신랄한 비판을 받은 바넘은 계속해서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면서 여러 차례의 개정판을 냈고,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책은 10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1884년에는 이윤에 대한 열망보다는 대중적인 평판을 위하여 누구나 저작권 침해없이 인쇄하여 판매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서전을 대중적인 판단에 맡겨버렸다. 바넘 스스로가 자신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잘 속는 사람'이라고 냉소했다고는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가정 생활

바넘의 가정생활은 전적으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딸 하나는 어려서 죽고, 또 한 딸은 그의 뜻에 어긋나게 간통을 저질렀다. 상속할 아들이 없다는 것에 실망했던 바넘은 그의 외손자가 자기 이름의 일부로 '바넘'을 사용할 것을 동의한다는 조건하에 상당한 유산을 손자 앞으로 남겨주었다. 1873년 44년 동안의 결혼생활 끝에 체리티 바넘이 죽고 그 이듬해에 당시 64세였던 바넘은 그를 숭배하던 영국인의 딸이었던 24세의 낸시 피쉬(Nancy Fish)를 2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말년

81세 되던 해 바넘은 중병에 걸렸다. 뉴욕의 신문기자를 부른 그는 사망기사를 사전에 미리 쓰게 하여 그것을 즐기고자 했다. 그로부터 2주 뒤에 서커스의 우편수취물을 조사하고 난 후 바넘은 코네티컷 주에 있는 그의 대저택에서 사망했다. 런던의 〈타임스(The Times)〉지는 마지막 조사에서 그에 대한 논평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는 흥행사란 직업을 웅대한 규모로 만들어냈고…… 일찍이 현대 민주주의의 본질을 깨달아 무엇을 즐기고 가르칠까 하는 것에 그 본질이 있음을 알았으며…… 그의 이름은 이미 하나의 격언이며 이 격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영향

바넘은 후일 서커스를 비롯한 흥행사업과 광고 홍보업계의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바넘의 일대기는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로 여러번 다루어졌으며, 1986년에는 <바넘>, 1999년에는 이라는 이름의 텔레비전용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17년 바넘의 일대기에 바탕을 둔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이 개봉되었는데, 마이클 그레이시Michael Gracey) 감독이 연출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배우 휴 잭맨(Hugh Jackman)이 바넘 역을 연기했다.

위대한 쇼맨

바넘의 일대기에 바탕을 둔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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