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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농민조합사건

다른 표기 언어 明川農民組合事件

요약 함경북도 명천군 남동부지역에서 1934년 4월경~1937년 9월 3회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일제에 투쟁한 사건. 명천지역의 농민과 청년들은 지역 단위별로 조직사업과 의식계몽을 꾸준히 하면서 일제의 계속되는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와해와 재건을 반복했다. 결국 1937년 200여 명의 구속자가 발생하면서 조직이 완전히 붕괴되었지만, 3년 동안 1,000여 명의 구속자를 내면서도 일제에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명천지역 농민과 청년들의 항일투쟁은 1931년 1월의 명천군 내 아가면 시위사건 이후 잠시 주춤했으나 중심인물들이 출감하면서부터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수광과 아가면 시위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감한 현춘봉(玄春逢) 등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와 9월 테제의 노선에 입각하여 1934년 4월 농민조합운동 명천좌익을 결성하고, 빈농을 중심으로 아간·하가·상가·하고 등 4개면에 그 지부를 결성했다.

1935년 1월 경찰이 조작한 위조전단사건으로 200여 명이 구속되면서 농민조합지도부가 와해되자, 1935년 6월 검거를 면한 김일천(金日天)·박금준(朴今俊) 등에 의해 농조지도부가 재건되었다. 이들은 각 면과 동 단위의 조직사업과 의식화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수천여 명에 달하는 농어민들을 조직했으며 기아반대투쟁, 추수투쟁, 친일주구 타도투쟁, 구속자 및 그 가족 구원사업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이 역시 1935년 12월 아가면 포항동에서 일어난 구속자탈환투쟁을 빌미로 이루어진 일제의 탄압으로 1936년 2월부터 8월에 걸쳐 600여 명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한편 검거를 면한 마수활·유준철(劉濬哲) 등이 1936년 7월 농조지도부를 다시 재건하고 각 지역의 하부조직을 정비해 일제와 투쟁을 계속했으나, 1937년 9월경부터 11월에 걸쳐 220여 명의 구속자를 내면서 조직이 붕괴되었다.

명천농민조합사건은 사랑방좌담회를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 합법·반합법 공간을 활용해 농민들의 의식화를 꾀했으며, 3년여에 걸쳐 구속자만도 1,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일제와 강고하게 투쟁했다는 점에서 항일운동사에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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