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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6. 9. 27, 미국 오하이오 베리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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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5. 2. 18, 애리조나 피닉스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언론인.
소위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고 불리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자문위원회 책임자였다.
고향 볼드윈윌리스대학을 졸업한 후 그의 고향인 오하이오 주 옴스테드폴스에 있는 한 학교에 교장으로 취직했다. 1913년 오벌린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5년 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3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의 교편생활중에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측근 루이스 하우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하우의 권유를 받아 여러 도시의 형사법을 연구하는 일을 하다가 1928년 루스벨트의 뉴욕 주지사 선거운동에 가담했다.
루스벨트가 1932년 대통령선거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컬럼비아의 동료교수 렉스포드 G. 터그웰, 애돌프 A. 벌 2세 등과 함께 하우의 제안으로 브레인 트러스트를 조직해서 민주당 후보자에게 국내문제를 자문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와 브레인 트러스트는 전통적인 보수적 자유방임이나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진보적 사고에서 탈피해 빈사상태에 빠진 미국경제를 재생시키기 위해 정부와 기업의 협조를 촉구했다. 그는 루스벨트의 많은 선거유세 연설문을 작성했고 유명한 '뉴딜 정책'을 고안해내기도 했으며, 곧 대통령 선거운동의 정책자문가 집단의 책임자가 되었다.
루스벨트 행정부가 발족하게 되자 그는 집행부의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백악관과 의회가 격돌을 했던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그는 둘 사이를 연결하는 데 뛰어난 교섭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33년 런던 경제회의중 루스벨트와의 불화로 상당한 권한을 잃게 되었고 곧이어 국무부에서도 사임했다. 그 이후 몰리는 뉴딜 정책이 급진적인 경향을 갖게 되자 이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1936년 루스벨트와 민주당과 결별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웬들 윌키, 배리 골드워터, 리처드 닉슨 등)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후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없었으며 남은 생애는 많은 정치이론서와 평론서를 출판하는 작가로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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