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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16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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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1. 6. 2, 에든버러 |
국적 | 스코틀랜드, 영국 |
요약 스코틀랜드의 귀족.
메리 여왕(1542~67 재위)을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572~78년 어린 국왕 제임스 6세(나중에 영국의 제임스 1세가 됨)의 섭정으로 있으면서 수년에 걸친 내란으로 약화한 중앙정부의 권위를 회복시켰다.
조지 더글러스 경의 아들로 태어나 1553년 장인인 모턴 백작 3세 제임스의 작위를 계승했다. 1557년 스코틀랜드의 신앙을 지지하는 신앙서약서에 서명한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한편이 되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였지만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에 의해 1563년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1566년 3월 9일 그와 몇몇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은 메리 여왕의 영향력있는 각료인 데이비드 리치오를 암살했다. 그러나 메리는 12월 그들을 사면했다. 그뒤 모턴은 메리의 위험스런 남편 단리 경 헨리를 제거할 음모에 어느 정도 관계했다. 단리는 1567년 2월 9~10일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 5월에 메리 여왕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보스웰 백작 4세 제임스 햅번과 결혼했다. 모턴은 6월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에서 보스웰을 몰아냈으며 7월에는 리번 호수에 있는 캐슬 섬에 메리를 유패시켰다. 그곳에서 메리는 자신의 어린 아들 제임스(국왕 제임스 6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퇴위해야만 했다. 여왕은 1568년 5월 2일 탈출했으나, 모턴은 11일 뒤에 글래스고 근처 랭사이드에서 메리의 군대를 완전히 격퇴했으며 메리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메리의 지지자와 제임스의 지지자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모턴은 섭정 머리 백작(1570 죽음) 제임스 스튜어트의 유능한 동맹자가 되었다. 1572년 섭정이 된 모턴은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고, 법질서를 회복시켰으며 개혁교회에 감독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가 추진하는 행정개혁에 반대했으며 장로파들도 감독제도를 거부했다.
그는 또한 영국인들을 설득해서 공식적인 방어동맹에 가입하게 하고 스코틀랜드에 재정지원을 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578년 반대자들의 강요로 섭정직을 사임한 그는 3년 뒤 단리 경 암살사건의 공범죄로 기소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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