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420경, 잉글랜드 도싯 비어레지스(또는 밀본세인트앤드루) |
---|---|
사망 | 1500. 10. 12, 켄트 놀 |
국적 | 캔터베리 |
요약 캔터베리 대주교, 추기경.
헨리 7세의 재위기간중 영국에서 큰 세력을 떨쳤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장미전쟁이 벌어졌을 때 랭커스터 가문 편을 들어 랭커스터가 출신 왕 헨리 6세 때 하위 성직에 임명되었으나, 1461년 요크가 출신 왕 에드워드 4세가 즉위하자 반역자로 몰려 부득이 사면을 호소했다.
1470년 그는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과 불만을 품은 요크 가문 사람들이 손을 잡도록 도와 에드워드 4세를 국외로 추방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는 1471년 왕권을 되찾은 뒤 모턴을 대사와 엘리의 주교로 임명했다(1479). 1483년 에드워드의 동생이 리처드 3세 왕이 되었을 때 모턴은 왕의 가장 큰 정적이 되었고, 왕에 의해 브레컨(브렉노크) 성에 감금되었다. 그곳에 갇혀 있는 동안 모턴은 버킹엄 공작 2세 헨리 스태퍼드를 도와 반란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끝나자(1483. 10) 플랑드르로 도피했다. 1485년 헨리 7세가 즉위하자 영국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큰 신임을 받고 영향력있는 왕실 고문이 되었다.
1486년 캔터베리 대주교, 1487년 대법관, 1493년에는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전통적으로 모턴은 헨리 왕의 세무관원들이 왕을 위해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서 자금을 짜내기 위해 만들어낸 궤변 '모턴의 갈퀴'(Morton's Fork)를 생각해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무관원들은 부자들은 세금을 낼 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재산을 숨겼다고 고발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종교인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