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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레티우스

다른 표기 언어 Saint Meletius of Antioch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381, 콘스탄티노플
국적 안티오크

요약 축일은 2월 12일. 4세기 안티오키아의 주교.

그를 중심으로 안티오키아 교회가 분열했기 때문에 그 분열을 멜레티우스 분열이라고 한다.

안티오키아 교회가 아리우스주의(→아리우스)를 둘러싸고 벌어진 교회의 분규에 지쳐서 양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온건한 인물을 원할 때 주교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견해가 아리우스주의자인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의 비위를 거슬려 곧 추방되었다(360).

멜레티우스가 안티오키아를 떠난 것은 이중의 효과를 가져와 아리우스주의자 주교가 임명되는 한편 멜레티우스를 지지하는 정통파가 결성되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화해하려는 시도(362)가 있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명한 금욕주의자 파울리누스가 주교로 임명되자, 멜레티우스의 추종자들이 멜레티우스 이외의 어떤 주교도 거부해 분열은 계속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고 363년 요비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멜레티우스는 추방지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멜리티우스는 파울리누스와의 일체의 타협을 거부함에 따라, 파울리누스가 주교로 인정받으면서도 멜레티우스 파가 남아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요비아누스의 뒤를 이어 364년 아리우스주의자인 발렌스가 동로마 제국을 다스리게 되자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은 다시 추방되었다.

378년에는 정통파 그라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379년 역시 정통파인 테오도시우스를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했다. 멜레티우스를 비롯해 추방되었던 반아리우스주의파 주교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교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파울리누스와 멜레티우스가 공동으로 주교가 된다는 제안이 나왔으나 파울리누스가 그 제안을 거부하자 멜레티우스가 주교로 선포되었다.

멜레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를 주재해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고 제국 안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종식시켰으나 이 공의회가 진행되는 도중에 죽었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분열은 그후로도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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