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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길리브레이

다른 표기 언어 Alexander McGillivray
요약 테이블
출생 1759경
사망 1793. 2. 17, 플로리다 펜서콜라
국적 크리크족

요약 미국 독립전쟁 뒤에 크리크족 인디언의 최고 추장으로 활동했던 인물.

맥길리브레이(Alexander McGillivray)

ⓒ Carlstak/wikipedia | Public Domain

그의 노력으로 크리크족 인디언은 부족적 일체감을 유지하고 고향땅의 대부분을 후손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 있었다.

맥길리브레이는 1783년 펜서콜라의 스페인군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크리크족 출신이며 그들의 추장"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필적이나 이름으로 볼 때 이 말은 사실은 아닌 듯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맥길리브레이는 실제로 인디언과 유럽인의 혼혈로,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출신 무역업자였던 래클랜 맥길리브레이였고 어머니는 프랑스인과 인디언의 혼혈인 쇼이 마샹이었다. 따라서 그의 혈통의 1/4만이 인디언 핏줄이었지만 크리크 인디언은 모계 혈통을 따랐기 때문에 그를 같은 부족원으로 받아들였다. 인디언의 관습대로 어릴 때는 주로 어머니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프랑스어와 인디언어 모두 할 수 있었으나 크리크족의 방식에 따라 자랐다.

14세 때 그는 개인교습을 받기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으로 보내졌으며, 잠시 조지아의 서배너에 있는 회계사무소에서 수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국왕파로 배척을 받아 재산을 몰수당하자 두 부자는 각각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해 아버지는 스코틀랜드로, 그는 크리크 부족으로 돌아갔다.

맥길리브레이는 고향에 돌아와 추장이 되었으며 영국은 그에게 대령의 계급과 인디언 대표 자격을 주었다. 독립전쟁 당시 크리크족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았다. 일부 크리크 인디언들은 애국파에 가담해 싸웠으나 대다수 크리크족은 맥길리브레이의 노력으로 국왕파 쪽에 남았다.

1782년 무렵 영국군의 패배가 확실해짐에 따라 크리크족은 영국과의 유대를 잃게 될 것으로 보였다.

미국의 토지 투기꾼과 땅을 잠식해 들어오는 정착민들을 깊이 불신하고 있던 맥길리브레이는 스페인의 지원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서(西)플로리다의 펜서콜라에서 회의를 가질 것을 제의했다. 1784년 6월 1일 이곳에서 맥길리브레이와 스페인 총독 에스테반 미로와 아르투로 오네일은 '협정·무역·평화에 대한 규약'이라는 제목의 협정서에 서명했다.

스페인은 자국의 지역 경계선 안에 있는 크리크족 지역을 스페인의 보호령에 편입하고 적절한 규모의 교역을 하기로 했다. 맥길리브레이가 거둔 보다 큰 성공은 스페인을 설득해, 상호 교역을 할 경우 영국 상품으로 하기로 하고 교역 계약은 영국 상인인 윌리엄 팬튼을 통해야 한다고 합의한 것이다. 그뒤 여러 해에 걸쳐 조지아와 미국은 끊임없이 토지와 무역상의 특권을 양도할 것을 제의해 왔으나 맥길리브레이는 이에 완강히 저항했으며, 때로는 습격대를 보내 인디언의 사냥터에 침입한 백인들을 쫓아내기도 했다.

1788년 미로 총독은 크리크족에 대한 스페인의 지원을 줄이겠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에 대해 맥길리브레이는 그러한 상황이 벌어질 경우 조지아와 미국 의회의 협상단과 더이상 협의를 회피할 수 없다고 답했다.

1789년 워싱턴 대통령은 수완 좋은 협상단을 보내 크리크족과 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이 제의한 경계선은 크리크족의 사냥터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이었으며 이와 함께 협상단은 크리크족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주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스페인이 다시 활발한 지원을 하게 됨에 따라 힘을 얻은 맥길리브레이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미국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지 못한 그는 동료 인디언과 함께 회의장을 떠났다. 워싱턴은 다시 다른 협상단을 보내 '산만큼이나 강력하고 강만큼이나 오래가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의하면서 맥길리브레이를 포함한 인디언 지도자들을 뉴욕 시로 초청했다. 인디언 대표들은 미국측 협상단과 함께 육로로 뉴욕에 갔는데, 거기서 당시 새로 결성된 정치단체인 세인트 태머니 협회의 환영을 받았다.

육군장관인 헨리 녹스와 맥길리브레이는 미국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미국 영토에 속하는 크리크족 지역에 한정하고 앨타마하 강 유역을 조지아와 크리크족 지역의 경계로 삼는 내용의 협상을 타결했다. 또한 맥길리브레이는 미국의 제의에 따라 미국군 소장 계급을 달고 매달 100달러의 봉급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능성에 불과했던 영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미국과는 교역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1792년 그는 스페인과 보다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뉴올리언스로 갔다. 스페인과 맺은 새 협정에는 크리크족이 미국인들에게 인디언 지역에서 떠나도록 지시하고, 스페인은 자국의 경계 안에 있는 크리크족 영토의 보전을 보장하는 동시에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공급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미국인들의 축출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맥길리브레이는 현명하게도 그다지 공격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맥길리브레이는 귀향길에 극심한 열병에 걸려 몇 달씩 거동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 건강해본 적이 없었으며 항상 몸이 아팠다. 심한 두통에 시달리는가 하면 염증과 관절염이 따라다녔고 성병(性病) 증세도 보였다. 결국 맥길리브레이는 34세 때 펜서콜라에서 죽었다. 팬튼은 그의 사인이 '위염'과 '급성폐렴'이라 밝히고 그를 자기집 정원에 묻었다. 맥길리브레이의 정책은 그가 죽은 뒤에도 계속 시행되어 크리크족에게 도움을 주었으나 팬튼이나 스페인, 그리고 크리크족은 모두 그를 대신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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