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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무인란 이후 신분질서의 와해와 피지배층의 사회의식 성장은 광범위한 민중항쟁을 유발시켰는데, 이 중 하나가 만적의 난이었다.
최충헌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1198년 5월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공·사 노비들을 모아놓고 봉기를 계획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에 모인 무리가 수백 명에 불과하여 거사가 어렵게 되자 거사일을 바꾸어 보제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으나, 한충유의 가노인 순정이 밀고하여 만적을 비롯한 주동자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짐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만적의 난은 실패했으나 무인정권시기에 천민계층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조직적인 신분해방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만적의 난은 고려 신분제 변동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후 민중봉기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무인란 이후 하극상 풍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면서 야기된 신분질서의 와해와 피지배층의 사회의식 성장은 각처에서 광범위한 민중항쟁을 유발시켰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만적의 봉기였다. 당시의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1198년(신종 1) 5월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 등과 함께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公)·사(私)노비들을 모아놓고 봉기를 계획했다.
만적은 "정중부와 김보당의 난 이래로 고관이 천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만 어찌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매질 밑에서 곤욕을 당해야만 하는가"라고 하여 모였던 이들의 동조를 얻은 뒤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웠다.
만적 등은 우선 황지 수천 장을 잘라 '丁'자를 새겨 표시하고, 흥국사 복도에 모여 있다가 격구터로 나아가면서 일시에 떼를 지어 북치고 소리치면 대궐 안에 있는 환자들과 관노들이 반드시 내응할 것이며 자신들은 성 안에서 봉기하여 먼저 최충헌 등을 없애고 이어서 각기 자기 주인을 쳐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천인이 없게 하면 공경장상을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약속한 날에 모인 무리가 수백 명에 불과하여 거사가 어렵게 되자, 거사일을 바꾸어 보제사에서 다시 모이기로 하고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당부했으나 율학박사 한충유(韓忠愈)의 가노인 순정이 밀고하여 만적을 비롯한 주동자 100여 명이 체포되어 강에 던져짐으로써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한편 봉기계획을 밀고한 순정은 은 80냥을 하사받고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를 제수받았다.
만적의 봉기는 미수에 그쳤으나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특히 무인정권시기에 들어와 천민계층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조직적인 신분해방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처음 거사일에 모인 무리가 예상 외로 적었음에도 수백 명에 이른 것이나 표지로 삼기 위해 준비한 황지가 수천 장이었다는 데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공사노비를 망라하여 봉기 가담자 각자가 담당해야 할 일 및 그 순서까지도 치밀하게 계획하여 천적을 없애고 천인 신분에서 해방될 것을 기도함으로써 이후 천민의 신분해방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보다 큰 의의는 정권의 장악까지 도모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것은 궁궐 안에서 동조하기로 되어 있던 환자와 관노들의 의도가 주로 반영된 것으로 보여지지만, 단순한 신분해방에 그치지 않고 최고 무인 집정자를 제거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려는 적극성을 보임으로써 반정부적인 성격을 나타냈다. 따라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만적의 봉기는 고려 신분제 변동에 하나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후 민중봉기의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5년 뒤인 1203년에는 습전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하여 상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개경의 가노들이 동쪽 교외에서 전투연습을 하다가 최충헌에 의해 체포되어 50여 명이 강에 던져졌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제2의 만적봉기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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