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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소

다른 표기 언어 萬人疏

요약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 1만 57명의 영남유생이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해 연명한 상소였다. 그뒤 1823년(순조 23) 경기도·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 지방의 유생 9,996명이 서얼을 차별없이 관리로 임용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1855년(철종 6) 경상도 유생 1만 432명이 장헌세자의 추존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개항 이후에는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유생들의 상소가 있었다. 1880년(고종 17)에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을 왕에게 올렸다. 그러자 1881년에 등 영남의 유생들이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개화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했는데, 이를 영남만인소라 불렀다. 이 만인소로 인하여 조선정부는 〈조선책략〉을 받아들이지 않고, 김홍집에게 책임을 물어 사직하게 했다.

유생들은 정부의 정책에 불만이나 이견이 있을 경우 상소를 통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상소는 주로 개인적으로 하나 때로는 많은 유생들이 연명으로 하기도 했다. 집단상소는 처음에 수백 명 정도가 연명했다가 후대로 가면서 규모가 점점 커져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1만 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하는 경우도 생겼는데, 이를 만인소라 불렀다.

최초의 만인소는 1792년(정조 16) 1만 57명의 영남유생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한 상소였다. 그뒤 1823년(순조 23) 경기도·호서·호남·영남·해서·관동 지방의 유생 9,996명이 서얼을 차별없이 관리로 임용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1855년(철종 6) 경상도 유생 1만 432명이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정조 때 개칭한 이름)의 추존(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로 올림)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개항 이후에는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영남유생들의 상소가 있었다.

1880년(고종 17)에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중국인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왕에게 올렸다. 그러자 1881년에 안동·상주 등 영남의 유생들이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개화정책을 비난하고 그 추진자들을 규탄했는데, 이를 영남만인소라 불렀다. 이 만인소로 인하여 조선정부는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받아들이지 않고, 김홍집에게 그 책을 소개한 책임을 물어 사직하게 했다.→영남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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