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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62. 7. 11, 뮌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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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26. 2. 26, 뮌헨 |
국적 | 독일, 바이에른 |
요약 바이에른의 선제후(1679~)이자 유능한 군인.
공국의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에서 처음에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손잡고 나중에는 이에 맞서 계속 전쟁을 치렀으며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적의 때문에 많은 영토를 잃었다.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로 1680년 성년이 되었고 3년 뒤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투르크와 싸웠다.
이 전투에서 그는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여(1688) 이름을 떨쳤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맞서 거의 모든 유럽 열강들이 연합해 싸운 대동맹전쟁(1689~97) 때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했고 1692년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1692 죽음)와 결혼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이 차지한 대부분의 영토를 물려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1699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죽자 모든 기대는 무너졌다. 그래도 그는 여러 해 동안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차지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공주 테레사 쿠니군다 소비에스카와 결혼(1694)함으로써 얀 3세(얀 소비에스키)가 죽은 뒤 폴란드를 상속할 가능성도 있었으나 결국 서유럽에 남아 있기로 결심했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3)이 터지자 그는 자신의 가문인 비텔스바흐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문 대신 신성 로마 제국 왕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프랑스 편에 섰다. 그러나 프랑스와 바이에른이 블렌하임 전투(1704)에서 패배한 뒤 막시밀리안은 바이에른에서 쫓겨났고 라미유 전투(1706)로 네덜란드도 잃어, 프랑스 궁정으로 피신했다.
위트레흐트 조약(1713)이 체결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왔고, 1715년 뮌헨으로 갔다. 1724년 독일에서의 군사작전을 통합하기 위해 비텔스바흐 가문연합을 조직했다. 그의 맏아들 카를 알베르트는 마침내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1742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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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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