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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젤란은 1517년 10월 20일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했다. 여기서 포르투갈의 우주론자 루이 팔레이로와 합류하고 함께 바야돌리드 궁정을 여행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국적을 버리고 카를로스 1세(후에 황제 카를로스 5세가 됨)의 수하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마젤란은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라는 스페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493년 포고된 로마 교황의 칙서에 따라 영토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분할되었다. 즉 새로 발견된 모든 지역과 앞으로 탐험될 모든 지역 중에서 새로 정한 국경선(1494년에 다시 고쳐짐)의 동쪽 지역은 포르투갈의 지배로 들어갔고, 서쪽 지역은 스페인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 풍요로운 스파이 섬(향료섬)은 이 경계선의 서쪽에 위치해 있어 스페인에 속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마침내 마젤란과 팔레이로는 이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탐험항해를 할 것을 제안했다.
1518년 3월 22일 그 제안은 왕에게 받아들여져 그들은 원정대의 합동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그 원정대는 몰루카스로 가는 모든 스페인 지배하의 항로를 찾도록 지시받았다. 그들이 발견한 모든 영토의 지배권은 그들과 그들의 후계자에게 귀속되었으며, 항해에서 얻은 순이익의 1/20은 그들의 몫이었다. 이는 모두 산티아고령으로 투자되었다. 이때 티에라피르메를 곧장 통과하는 해협을 발견했던 마젤란은 그의 배를 이끌고 대서양에서 '남해'로 항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희망봉을 피해 가기 위해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서 동방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었다.
왕의 승인을 받은 마젤란과 팔레이로는 바로 그 해협을 찾도록 명령받았다. 그리고 당시 동인도의 업무를 맡고 있던 관리들은 이 원정대에 5척의 배를 공급하도록 명령받았다. 원정대는 세비야에서 항해준비를 했는데, 이곳에서 포르투갈 중개상이 계획을 무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마젤란의 기함은 트리니다드호였고 산안토니오호·콘셉시온호·빅토리아호·산티아고호 등이 동행했다. 팔레이로는 정신착란으로 이 항해에 참여하지 못했다.
마젤란은 1517년 세비야 고위관리의 딸 베아트리스 바르보사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와 아직 갓난아기였던 아들 로드리고에게 작별을 고한 뒤 1519년 9월 20일 산루카르데바라메다를 떠났다. 선원은 9개국에서 온 사람들로 270명이었다. 이 함대는 9월 26일 테네리페에 도착한 뒤 10월 3일 브라질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기니 만에서는 폭풍을 만나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묶여 있다가 11월 29일에야 세인트아우구스티네 곶 남서쪽 129.6㎞ 지점에 도달했다.
그들은 다시 카보프리오를 돌아 12월 13일 리우데자네이루 만에 도달한 뒤 해협을 찾아 남쪽 라플라타 강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그러나 라플라타는 결국 해협이 아니라 강어귀임이 밝혀졌다. 3월 31일에는 남위 49。 20' 세인트줄리안 항구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부활절 밤을 보내던 중 스페인 태생 선장들이 포르투갈 지휘관인 마젤란에게 반항해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그는 가차없이 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려 선장 1명을 사형시키고, 1520년 8월 24일 이 항구를 떠나면서 다른 1명을 이곳에서 운명을 마치도록 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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