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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 3. 12, 싱가포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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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5. 12. 12, 싱가포르 |
국적 | 싱가포르 |
요약 싱가포르의 변호사·정치가·외교관.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건국에 기여했다.
데이비드 마셜은 1959년 권위적인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PAP)이 정권을 잡은 이후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개진했다. 한때 PAP가 이룩한 놀라운 경제성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던 마셜은 경제적인 발전이 초래한 인간성의 상실을 목격한 뒤로는 이를 비판했다.
바그다드 출신 유대계 이주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영국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37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영국 식민지 군대에 복무하다가 1942년 일본군 포로가 되어 홋카이도[北海道]의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하기도 했으며 그후에는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성공했다. 그는 절대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는데 PAP가 배심원제도를 폐지한 것도 그의 법정에서의 능란한 변론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1950년대 초반, 싱가포르가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정치에 입문한 마셜은 사회주의 노동전선을 공동 설립하고 1955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었다. 말레이 민족 전국조직과 말라카-중국 민족협의회가 제휴한 정부를 조직했고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55년말 성공은 못했지만 독립회담을 위해 사절단을 이끌고 런던으로 갔을 때, '독이 든 크리스마스 푸딩'을 접대했다고 영국을 비난했다. 1956년 2차 사절단 역시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총리직을 사퇴했다. 1962년 노동당을 창설하여 총재가 되었으나 총선에서 패배했다. 1972년에 정계에서 은퇴한 마셜은 1978년까지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이후 15년 동안 프랑스·포르투갈·스페인·스위스 등지의 대사로 활동했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직후 다시 변호사업을 시작한 그는 정부를 거리낌없이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4년 싱가포르에서 미국의 10대 소년인 마이클 페이가 다른 사람의 자동차에 페인트 칠을 해, 사유재산을 손상한 죄로 태형 판결을 받은 데 대해 공적으로 반대의견을 밝힌 극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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