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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53, 덴마크 쇠보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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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12. 10. 28, 플렌스부르크 |
국적 |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
요약
덴마크(1375~)·노르웨이(1380~)·스웨덴(1389~)의 섭정.
(영). Margaret I.
개요
외교와 전쟁을 통해 칼마르 연방 결성(1397)을 추진했다.
이 연합에 의해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은 1523년까지 통일을 이루었고 스웨덴이 탈퇴한 뒤에도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1814년까지 통일을 유지했다.
정권장악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딸로 겨우 6세 때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왕 망누스 에릭손의 아들이며 노르웨이 왕인 호콘과 약혼했다.
이 약혼은 메클렌부르크 공작가문이 스칸디나비아의 왕위계승을 주장한 데다가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의 귀족 파벌들이 음모를 꾸미자 그에 대항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1360년 덴마크의 발데마르와 스웨덴의 망누스 사이에 해묵은 분쟁이 다시 일어나 마르그레테의 약혼은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군사적인 실패와 내부 귀족계급의 반발로 망누스는 1363년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를 접어두고 마르그레테와 호콘을 코펜하겐에서 결혼시켰다.
호콘은 스웨덴 왕이 되기를 원했으나 결혼 직후 아버지와 더불어 메클렌부르크의 알베르트에게 패배함으로써 꿈이 좌절되었고, 알베르트가 1364~89년에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호콘은 노르웨이 왕국만은 계속 지켰으며 마르그레테는 그곳에서 스웨덴의 성녀(聖女) 브리기타의 딸인 메르타 울프스도테르의 보호를 받으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일찍이 통치에 재능을 보였으며 이내 남편을 압도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1370년에는 이들 사이의 유일한 자식인 울라프가 태어났다.
1375년 아버지가 죽은 뒤 마르그레테는 메클렌부르크 가문의 반대를 물리치고 자기 아들 울라프가 덴마크 왕에 선출되도록 했으며, 1380년 호콘이 죽자 노르웨이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이렇게 해서 1814년까지 이어진 덴마크·노르웨이 연합이 출범했다. 그녀는 계속 자신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넓혀나가 1385년에는 스칸디아 서해안의 중요한 경제거점을 한자 동맹으로부터 되찾았고, 또한 홀슈타인 백작가문과 협정을 맺어 당분간 덴마크의 남쪽 변경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1385년에 성년이 된 울라프는 1387년 어머니와 함께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알베르트와 전쟁을 벌이려고 하던 참에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러자 마르그레테는 자신의 외교술을 총동원해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섭정을 맡았고 6세된 조카인 포메라니아(포메른)의 에리크를 후계자로 입양해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그뒤 스웨덴의 실력자였던 총리 보 욘손 그리프의 토지처분에 관한 유언을 놓고 벌어진 분쟁에서 인기없는 국왕 알베르트에게 반기를 든 스웨덴 귀족들과 합세했다. 1388년의 달라보리 조약에 의해 스웨덴 귀족들은 마르그레테를 스웨덴의 '여군주이며 정당한 통치자'로 선포하고 보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 대부분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1389년 알베르트를 패배시킨 그녀는 그를 포로로 잡았다가 6년 뒤 평화조약이 타결된 후에야 풀어주었다. 알베르트의 지지자들은 발트 해의 해적단과 동맹을 맺어 스톡홀름에 대항했지만 1398년 항복했다.
칼마르 의회
마르그레테는 이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명실상부한 통치자였다.
그녀의 후계자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는 1389년 노르웨이의 세습군주로 선포되었고 1396년에는 덴마크와 스웨덴(핀란드까지 포함)의 왕으로 뽑혔으며 이듬해 스웨덴 남부의 도시 칼마르에서 3국의 지도층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대관식을 올렸다. 그러나 귀족계급은 마르그레테가 점점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명을 칼마르에서 발표했다. 현존하는 다음 두 기록은 2가지 정치원리가 갈등을 겪었던 흔적을 보여준다. 이른바 대관식법령에는 세습적인 절대군주제의 원리가 표현되어 있는 반면, 이른바 연방법령에는 일부 귀족들이 선호하는 선거에 의한 입헌군주제의 원리가 표명되어 있다.
그러나 칼마르 의회는 마르그레테와 절대주의의 승리였다. 왜냐하면 중세 스칸디나비아의 문서 중 역사가들에게 가장 큰 논란거리인 연방법령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칼마르 동맹).
에리크가 대관식을 올린 뒤에도 마르그레테는 죽을 때까지 연방 3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왕실의 중앙집권을 더욱 강화시켜 자신의 옛 세습영지인 덴마크를 중심으로 스칸디나비아 통일국가를 굳건히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귀족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무회의의 권한을 제한했으며 왕실에서 임명한 셰리프(지방치안관)들의 연결망을 통해 행정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 그녀는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세금이 면제되어 있는 교회의 재산과 토지를 몰수했다. 그와 같은 정책이 연방에 치명적인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관철되었다는 사실로 그녀의 외교적 수완과 무자비함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공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과 교황청의 관계를 능란하게 이용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주교 선출문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마르그레테의 정치적 재능은 대외문제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그녀의 주요목표는 독일의 북방 팽창을 막고 덴마크의 남쪽 변경을 안정·확대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외교수단을 써서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홀슈타인과 무력충돌이 벌어졌으며 전쟁중에 마르그레테는 갑자기 죽었다(1412).
평가
스칸디나비아의 가장 탁월한 군주였던 마르그레테는 자기 왕국 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뿐 아니라 독일 제후들의 야망과 한자 동맹의 우월한 경제력에 맞서 자신의 권위를 지켰다.
그녀가 세워 유산으로 남긴 통일왕국은 강력한 군주제로 결속되어 있었으며, 중간에 파란을 겪으면서도 1523년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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