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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의 중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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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아구 백작 부인과의 만남

1834년 리스트는 라마르틴의 시 모음집을 바탕으로 만든 모음곡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과 3부분으로 된 모음곡 〈환영 Apparitions〉으로 성숙한 작곡가로 부상했다.

이 작품들의 서정적인 양식은 이전의 작품들과 현저한 대조를 보였고, 이것은 스승인 체르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같은 해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드 뮈세를 통해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다구 백작의 부인 마리 드 플라비니를 만났으며, 플라비니(마리 아구 백작 부인)와 연인 사이가 되었다. 1835년 플라비니는 남편과 가족을 떠나 스위스에서 리스트와 살게 되었다. 12월 18일 둘 사이에 첫딸인 블랑딘이 태어났고, 가끔 리스트가 파리를 방문하기도 했으나 두 사람은 주로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지에서 4년 동안 같이 살았다.

리스트는 새로 설립된 제네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예술가의 지위에 대하여 On the Position of Artists〉라는 일련의 논문을 출판했다. 리스트는 이 글을 통해 그때까지만 해도 고급 하인 정도로 취급받던 예술가의 지위를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위로 향상시키고자 했다.

리스트는 각기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풍경을 시적으로 그린 〈순례의 해 Années de pélerinage〉의 첫 2권에서 다구 백작 부인과의 만남을 축하했다.

또한 젊은 시절에 쓴 〈48개의 연습곡 Étude en 48 exerices〉을 바탕으로 여기에 연주적 측면을 강화시킨 〈초절기교연습곡 Transcendental Studies〉의 첫 판을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6개 작품들(5개 연습곡과 환상곡 〈종〉)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베토벤의 교향곡 3곡, 슈베르트의 가곡 몇 곡, 그밖에 베를리오즈의 작품 등도 편곡했다.

초절기교연습곡(Transcendental Studies)

ⓒ Cropped from/wikipedia | Public Domain

이러한 편곡 작업으로 사람들에게 편곡 전 원래의 작품들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고, 그결과 그다지 사람들의 눈에 들지 못하던 이 작품들을 널리 보급시켰다. 또한 당시의 인기 오페라들과 수많은 환상곡을 작곡해서 청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1837년 2번째 딸인 코지마와 1839년 아들 다니엘이 태어났지만, 그해말 플라비니와의 사이가 나빠져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로 가버렸다. 리스트는 본에서 베토벤 기념비 완공을 목적으로 발족된 베토벤 기념 위원회 기금 마련 연주회를 계기로 다시 거장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8년 동안 유럽 전역에 순회 연주를 다녔고, 아일랜드·포르투갈·터키·러시아 등지에서도 연주회를 열었다.

여름이면 마리 드 플라비니와 아이들과 함께 라인 강 노넨베르트 섬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1844년 둘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고, 리스트는 아이들을 파리로 보냈다. 그동안 리스트는 거장 연주자로 인기 절정에 올랐으며 어느 곳에서나 열렬한 갈채와 선물 공세가 쏟아졌다. 또한 애인도 많았는데, 그중에는 무용수 롤라 몬테츠, 알렉산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 La Dame aux camélias〉의 모델이 된 마리 뒤플레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리스트는 계속해서 피아노곡뿐 아니라 가곡 등을 작곡했다.

1839~40년에는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헝가리를 방문했고,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리스트는 집시 음악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갖게 되었고, 이것은 〈헝가리 광시곡 Hungarian Rhapsodies〉을 비롯한 헝가리풍으로 된 그의 여러 작품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1845년 베토벤 축제를 위해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그의 최초의 칸타타 1곡과 그밖에 합창 소품 몇 곡을 작곡했다.

바이마르에서의 작품활동

1847년 2월 리스트는 키예프에서 카롤리네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폴란드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서 얼마간 보냈다.

얼마 안 지나 그녀는 리스트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할 것을 권했으며 리스트는 그해 9월 옐리자베트그라드(키로보그라드)에서의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을 끝마쳤다. 1843년 독일 바이마르 궁정에서 음악 감독을 지냈고 1844년 이후 그곳에서 연주회를 열어왔으며, 1848년에는 그곳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을 불러들였지만 남편과 이혼하고자 한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둘은 알텐부르크에서 동거했다. 리스트는 궁정 악단의 오페라나 연주회를 지휘했을 뿐 아니라 작곡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 기간이야말로 리스트가 최대로 창작에 몰두할 수 있던 때였다. 12개의 교향시를 작곡했고, 이밖에도 〈파우스트 교향곡(3명의 인물묘사에 의함) Eine Faust-Symphonie in drei Charakterbildern〉·〈단테 교향곡(단테의 〈신곡〉에 의한 교향곡) Eine Symphonie zu Dantes Divina Commedia〉, 피아노 소나타, 2개의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죽음의 춤 Totentanz〉, 〈초절 기교 연습곡〉 수정판,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초절 기교 연습곡 Etudes d'exécution transcendante d'après Paganini〉 수정판, 〈순례의 해〉 Ⅰ, Ⅱ집 수정판, 합창곡 등 수많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 중 어떤 것들은 1849년 이전에 초고를 적어놓은 것이긴 하지만, 당시 리스트의 작품 창작은 수적인 면에서만도 엄청난 것이었다.

당대 전위적 작곡가들은 바이마르를 최첨단 작품을 접할 수 있는 도시 중 하나로 꼽았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리스트에게 배우러 왔다. 이른바 신독일악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더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이것은 당연히 전통적인 음악 이론을 추구하는 음악가들을 분개하게 했다.

바이마르 궁정에 속한 일부 음악가들은 리스트가 계속해서 바그너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리스트는 1849년 바그너가 정치적 행동으로 독일을 탈출해 스위스로 도망가는 것을 도왔음). 엄격한 도덕성을 지닌 바이마르의 시민들은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이 공공연하게 리스트와 동거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개했고, 바이마르의 대공 부인은 러시아에 있는 오빠 니콜라스 1세로부터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의 궁정 내 모든 활동을 금지시켜 달라는 압력을 받았다.

더구나 애초에 리스트를 임명한 바이마르 대공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후임자는 음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리스트는 5년 뒤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1861년까지 바이마르에 계속 머물렀지만 그는 점점 더 수세에 몰렸다. 1859년 아들 다니엘이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리스트는 깊은 슬픔에 싸여 관현악을 위한 3개의 장송 송가 중 첫번째 곡 〈죽은 자들 Les Morts〉로 아들의 죽음을 위안했다. 1860년 5월 비트겐슈타인 후작 부인은 교황에게 러시아에 있는 남편과의 이혼을 허락 받기 위해 바이마르를 떠나 로마로 갔고, 그해 9월 리스트는 정신 혼란의 상태에서 유언을 할 정도였다.

리스트는 이듬해 8월 바이마르를 떠났고, 베를린과 파리를 여행하고(거기서 마리 아구 부인을 만나게 됨) 로마에 도착했다. 리스트와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은 리스트 50세 생일에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교황이 후작과의 이혼에 대한 허락을 취소했다. 이후 둘은 로마에 남았지만 서로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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