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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80. 5. 20,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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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5. 9. 2, 스페인 카디스 |
국적 | 아르헨티나 |
요약 아르헨티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그는 유능한 지도자였지만 서로 싸우던 지방들을 단합시키고 지방 카우디요스(caudillos:군사지도자로 정계 유력자들)를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1806년 영국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했으며, 스페인에 대한 1810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혁명의회 비서가 되었다. 1811년 혁명 삼두정치를 이끌면서 민병대를 조직하고 스페인 법정을 해체했으며, 언론검열을 해제시키고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1814년 원래 아르헨티나의 주(州)였던 라플라타 연합주를 위한 영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요한 임무를 띠고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유럽에서 6년 동안 있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1821년 마르틴 로드리게스 정부의 각료로 임명되었으며, 1826년에는 연합주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럽에 있을 때 제러미 벤담과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앙리 드 생시몽, 샤를 푸리에 등을 만나 이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들의 생각 일부를 받아들여 선거권을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에게까지 확대했고, 의회와 사법 제도를 조직했으며, 언론의 자유와 개인권·재산권을 보장하는 법률제정을 지원했다. 한편 종교재판소를 폐지하고 의무적인 십일조를 없애버림으로써 교회로부터 계속 지탄을 받았다.
그의 이민장려책은 실패했으며, 토지개혁 정책은 결국 소작농이 아니라 지주들인 소수 독재정치가들의 이익을 돕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영구적인 것은 문화정책인 것 같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를 세우고 박물관 건립을 지원했으며, 국립 도서관을 확장시켰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리바다비아 행정부는 종종 절망적인 어려움에 빠졌다.
나중에 독립 우루과이가 된 영토의 소유권 문제를 놓고 브라질과 전쟁을 치르면서,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이 지역의 패권을 브라질에게 안겨주는 조약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실도 없는 전투를 계속해야만 했다. 또한 강력한 지방 카우디요스와의 끊임없는 분쟁에 말려들었으며, 그들로부터 중앙집권적 성격을 지닌 1826년의 헌법 수락을 받아낼 수 없었다.
1827년 사임한 뒤 유럽으로 망명했으나, 1834년 그의 정적들이 제기한 고발에 대응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왔다. 즉각 추방이라는 선고를 받고 처음에는 브라질로 갔다가 나중에는 스페인으로 갔다. 그의 유해는 1857년 아르헨티나로 송환되었으며, 1880년 그의 생일이 국경일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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