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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9. 8. 20, 잉글랜드 햄프셔 노스스톤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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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0. 9. 9, 글로스터셔 웨스턴슈퍼메어 |
국적 | 영국 |
요약 성공회 사제·신학자.
옥스퍼드 운동의 지도자였던 에드워드 부버리 퓨지(1800~82)의 가까운 친구로 그의 전기를 썼다. 정교한 전례, 18세기 교회 규범의 회복, 고전적 학문 강조 등의 내용이 들어 있는 옥스퍼드 운동의 원리를 주창했다.
1852년 사제서품을 받고 1854년 옥스퍼드셔 카데스던에 새로 설립된 신학교의 부총장이 되었으며 1859년에 옥스퍼드 세인트 에드먼드 홀의 부총장이 되었다. 1845년 중심인물이었던 존 헨리 뉴먼이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하자 옥스퍼드에서의 직위를 이용하여 쇠퇴를 겪던 옥스퍼드 운동을 계속적으로 진전시켰다. 1864년 당시 성공회 내에서 옥스퍼드 운동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리의 개혁에 찬성한 몇 안 되는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인 샐리스베리의 주교 W. K. 해밀턴의 전속 사제가 되었다.
연설가로서 리든의 명성은 그가 1866년에 한 뱀프턴 강연에 의해 높아졌는데, 이 강연은 그 이듬해 〈우리의 주,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The Divinity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870년 런던 세인트폴 성당의 참사가 되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의 성서 해석 교수가 되었다. 세인트폴 성당에서 행한 그의 설교는 그후 20년 동안 매우 많은 청중을 매료시켰다.
옥스퍼드 운동에 가담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줄기차게 성직 승진(교회의 승급제도)에 반대했고 적어도 2차례 주교직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교의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1869~70년 바티칸 공의회 이후 복고 가톨릭 교회 운동(Old Catholic movement)을 발전시키는 데 적극 참여했으며 러시아와 중동 등을 돌며 정교회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퓨지의 동료이자 찬양자였던 리든은 옥스퍼드 운동에 참여한 젊은 사상가들과는 대조적으로, 퓨지의 태도에 찬동을 보냈다.
1882년에 퓨지가 죽자 그에 대한 전기를 쓰기 시작해 4권으로 된 〈에드워드 부버리 퓨지의 일생 Life of Edward Bouverie Pusey〉(1893~97)을 출판했다. 리든 자신의 일생은 J. O. 존스턴의 〈헨리 패리 리든의 일생과 문학 Life and Letters of Henry Parry Liddon〉(1904)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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