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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3, 프랑스 베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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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25. 2. 17,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자코뱅 독재(1793~94) 때 혁명 프랑스를 다스린 공안위원회 위원(→ 프랑스 혁명).
프랑스 군대의 보급 체계를 조직했고, 공안위원회가 시행한 중앙 경제계획의 대부분을 관장했다.
1789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베르네의 부유한 변호사였다.
혁명적 입법의회(1791. 10~1792. 9) 의원으로 뽑혔으며, 입법의회의 뒤를 이은 국민공회(國民公會)에서도 의석을 얻었다. 루이 16세의 재판 때 루이의 반혁명적 '범죄'를 고발하는 보고서 초안을 마련했고(1792. 12) 국민공회의 대다수 의원과 함께 왕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다(1793. 1). 1793년 4월 6일에 구성된 초대 공안위원회 위원에 피선, 그뒤 자코뱅 클럽 사람들이 만든 산악당(Montagnards) 편에 서서 프랑스가 유럽의 주요 열강들과 싸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엄격한 통제하의 경제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93년 6월 2일 산악파가 적대 관계에 있는 온건파 지롱드당을 국민공회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7월 10일에는 자코뱅당원이 대부분인 제2대 공안위원회에 재선되었다.
10월에 랭데는 군수용 식량과 물자를 징발할 중앙 식량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그가 창설한 효율적인 조직은 얼마 안 가 농산물과 공산품의 생산과 분배를 대부분 통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온건주의자였다. 그는 언젠가는 이러한 통제 정책이 끝나기를 기대했고 반혁명주의자에 대한 테러 행위를 비난했으며 파리 하층 계급의 요구에는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공안위원회 위원장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를 자주 지지했으나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테르미도르 9일 음모(1794. 7. 27)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자코뱅 체제에 맞선 테르미도르 반동 때에 공안위원회 위원직에서 물러났다(1794. 10). 1799년 6월 총재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1월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뒤로는 파리에서 변호사로 일하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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