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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많은 장군을 배출한 프랑스의 귀족 가문.
가문의 이름은 푸아투(지금의 라 트리무유) 지방의 한 마을에서 따온 것이다. 일찍이 11세기에 피에르 드 라 트레무아유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이 가문은 15세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문의 초기 인물들은 여러 번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는데, 기(1397 죽음)는 부르고뉴 공작 장과 함께 십자군에 참가해 헝가리로 갔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투르크군에게 사로잡혔으며, 그뒤 프랑스로 돌아오다가 로도스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조르주(1382경~1446)는 샤를 7세의 고문관을 맡아 처음으로 가문의 이름을 떨쳤으며 백년전쟁 때는 잉글랜드-부르고뉴 동맹군을 격퇴하려 한 잔 다르크를 저지했다(1429~30).
조르주의 아들 루이 1세(1431경~83)는 결혼을 통해 이른바 탈몽 공국과 투아르 자작령을 받았고, 그의 아들인 루이 2세(1460~1525)는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떨쳤다. '나무랄 데 없는 기사'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성년이 되기 전 제후들이 일으킨 반란을 생토뱅뒤코르미에에서 격퇴했으며(1488) 이탈리아와 싸울 때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파비아 전투에서 죽었다. 루이 2세의 아들이 1515년 마리냥에서 이탈리아군과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에 루이 2세의 손자 프랑수아(1502~41)가 가문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가 폐위당한 나폴리 왕인 아라곤의 페데리코의 손녀 안 드 라발과 결혼함으로써 라 트레무아유 가문은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프랑스에 대해 자신을 외국 군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수아의 아들 때 가문은 3파로 갈라졌다. 투아르 가문을 세운 루이 3세(1522~77)는 1563년 투아르 공작위를 받았으며 투아르, 라 트레무아유 공작들과 탈몽, 타랑트 대공들은 모두 그의 자손이다. 다른 아들인 조르주는 로앙 후작 가문과 올론 백작 가문을 창시했고 클로드(1566 죽음)는 누아르무티에 가문을 세웠다.
루이 3세의 아들 클로드(1566~1604)는 처음에는 프랑스 왕 앙리 3세의 편을 들어 위그노들과 싸웠으나 뒤에는 신교도인 나바라 왕 엔리케 3세 쪽으로 돌아섰다(1586). 나바라 왕이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즉위하자 그는 귀족이 되었다(1595). 이 지파의 자손들은 계속 전쟁에서 이름을 날렸다. 클로드의 손자 앙리 샤를(1620~72)은 프롱드의 난(1648~53 : 왕권 절대주의에 맞서 파리 고등법원에서부터 시작된 반란) 때 왕을 상대로 싸웠다. 샤를 부르타뉴 마리 조제프(1764~1839)와 그의 동생 앙투안 필리프(1765~94)는 프랑스 혁명 때 철저한 왕당파였으며 방데 반혁명봉기(1793~96)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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