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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5. 10. 31, 프랑스 바욘 근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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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2. 11. 25(?), 알지에 |
국적 | 프랑스 |
요약 알지에와 카르타주(지금의 튀니지의 튀니스)의 추기경·대주교.
아프리카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아프리카 선교회를 세웠는데, 이 선교회는 백의선교회(白衣宣敎會 White Fathers)라고도 불렸다. 파리의 생쉴피스에서 공부한 뒤 1849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소르본대학에서 가르쳤으나 근동 교육진흥회 회장직을 맡기 위해 교수직을 사임했다. 이슬람교에서 갈라져나온 종교를 믿는 중동 사람들 드루즈인이 1860년 자행한 학살에서 살아남은 마론파교도(레바논 그리스도교인)들을 도왔는데, 이때에 레바논을 여행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선교계획을 세우게 했다.
1863년 프랑스 낭시의 주교, 1867년 알지에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 3세의 지지를 받은 라비주리는 그 지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알제리의 회교도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으며, 고아들을 위한 마을을 세웠다. 1868년 알제리 북부지방 선교를 위해 백의선교회를 세우고 1878년까지 이 선교회의 활동을 아프리카 적도지방까지 확대시켰다. 튀니지로 활동 범위를 넓히면서, 1882년에 교황 레오 13세로부터 추기경 임명을 받았으며, 1884년에는 아프리카의 수석대주교 및 복구된 카르타주 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노예제도를 늘 반대했으며, 말년에는 주로 중앙아프리카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노예제도 협회를 조직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죽은 지 3년 후 백의선교회는 서아프리카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으며, 마침내 1908년 교황 성 피우스 10세에게서 승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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