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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다른 표기 언어 lighthouse , 燈臺

요약 최초의 등대는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등대로 알려져 있다. 16세기부터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19세기까지 나무·양초·기름 등을 이용했다. 18세기 후반 무연 기름등이 발명되었고, 19세기 무렵에는 프리즘 렌즈와 반사경을 이용해서 기름등의 약한 불빛을 한 점으로 모아 강한 빛을 내게 했다. 이후 회전등이 등장하였고, 20세기초에는 등유와 아세틸렌 가스를 사용하는 등이 개발되었다.
1920년대 전기등이 일반화되었으며, 오늘날에는 크세논 플래시 진공관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 등대 불빛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사이렌이나 경적 소리 등을 이용해서 경고 신호를 전달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레이더·로랜 등 다양한 항해설비들이 개발됨에 따라 등대의 역할은 크게 감소했다.

바다에서 등대를 바라보면 낮에는 등대의 독특한 색깔로, 밤에는 등대 불빛의 빛깔이나 점멸등의 깜박거리는 섬광으로 식별할 수 있다.

거문도 등대

거문도 등대, 다도해와 제주도의 연안항로를 밝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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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등대로 알려져 있는 것은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있는 높이 110m 가량의 등대이다(→ 파로스 섬의 등대). 기원 후 처음 몇 세기 동안 페니키아인과 로마인들은 흑해에서 영국에 이르는 지중해와 대서양의 해안을 따라 여러 곳에 등대를 세웠다.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로는 해상무역이나 여행이 거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12세기에 이르러 무역이 부활할 때까지 유럽에서는 등대가 세워지지 않았다. 가장 먼저 등대를 다시 세우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들이었으며, 한자동맹 이후 스칸디나비아 해안과 독일 해안을 따라 많은 등대가 세워졌다. 16세기 말엽까지 유럽 해안 주변에는 30여 개의 등대가 세워졌다.

근대적인 등대의 역사는 18세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에는 등대의 망루를 나무로 만들었으나, 목재 망루는 거센 폭풍에 무너져 휩쓸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마침내 1759년 영국에서 지반이 불안정한 에디스톤록스 모래사장에 최초로 벽돌 등대가 세워졌다. 토목기사 존 스미턴이 설계한 이 등대는 고전적인 쌍곡선 설계를 이용한 최초의 등대로 기록되어 있다. 스미턴의 혁신적인 설계가 성공을 거두자 잇달아 각지의 공해(公海)에 수많은 등대가 세워져 1820년경에는 전세계적으로 주요등대가 약 250개에 달했다(→ 에디스톤 등대).

벽돌은 20세기 들어 콘크리트와 강철에 밀려날 때까지 등대 건축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라디오 방송탑과 비슷한 형태인 최근의 등대는 이전부터 사용해온 견고한 기둥 대신 강철 골조를 이용해서 건조되었다.

공해에 세워진 등대는 설치방법에 따라 크게 3가지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 속이 빈 강철기둥 케이슨을 해저에 박고 그 속에 콘크리트를 채운 뒤, 그 위에 등대를 세우는 방식이다. 둘째, 콘크리트 기초물을 해저에 가라앉힌 다음 그곳에 등대의 망루를 고정시키는 방식이다.

셋째, 바다의 유정(油井)과 비슷한 형태로 해저에 몇 개의 강철 말뚝을 박아넣어 커다란 갑판을 받치게 하고, 그 갑판 위에 망루를 세우는 방식이다.

16세기부터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석탄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이집트 파로스 섬의 등대가 세워지면서부터 19세기까지는 계속해서 나무·양초·기름 등으로 불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 연료는 연소과정에서 연기가 발생해 바람이나 물로부터 불을 보호하기 위해 끼워 놓은 유리창에 금방 그을음을 만들었다.

따라서, 18세기 후반 물고기·식물·광물 등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연기가 나지 않는 기름등을 발명한 것은 혁명적인 발전이었다. 무연 기름등은 빛이 보다 선명하고 뚜렷했을 뿐만 아니라, 렌즈와 금속 반사경으로 빛의 밝기와 범위를 늘릴 수도 있었다. 19세기 무렵에는 프리즘 렌즈와 반사경을 이용해서 기름등의 약한 불빛을 한 점으로 모아, 오늘날 자동차 전조등에 못지 않은 강한 빛을 내게 했다. 한편, 이처럼 빛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이용하게 되면서 램프를 회전시켜야 할 필요가 발생해, 지금은 널리 보편화되어 있는 회전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20세기초에는 등유와 아세틸렌 가스를 사용하는 등이 개발되었는데, 특히 아세틸렌 가스등은 조작이 쉽고 내구력이 강해 지금까지도 일부 등대에서 사용되고 있다. 회전등이 개발된 초기에는 등을 회전시키는 발동기에 커다란 괘종시계 모양의 구동 스프링이 달려 있었으나, 나중에는 연료로 쓰이던 아세틸렌 가스를 이용해 발동기를 돌렸다.

1920년대에는 전기등 개발이 완성되어 곧 널리 일반화되었다(→ 조명). 당시의 전기등은 다른 어떤 등보다도 훨씬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아크 등으로서, 1개가 무려 5억 촉광의 빛을 낼 수 있다. 또한, 렌즈와 반사경을 더욱 정제한 결과 비교적 작은 250W 전구로도 수십만 배의 촉광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사진기의 재생 플래시처럼 순간적으로 터지면서 아주 멀리서도 보일 만큼 강렬한 빛을 내는 크세논 플래시 진공관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날씨가 나빠 등대와 그 불빛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에는 대신 소리를 이용해서 경고 신호를 전달했다. 소리 신호로는 수세기 동안 대포나 종이 이용되었고, 보다 최근에는 사이렌이나 경적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소리가 미칠 수 있는 범위는 기상 상태에 따라 크게 다르므로, 대다수의 등대에는 라디오 비컨과 함께 레이더 비컨을 설치해 배의 레이더를 증폭하거나 항행자가 식별할 수 있는 고유한 신호를 발사한다.

지금도 등대는 항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레이더·로랜 등 다양한 항해설비들이 개발됨에 따라 그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다.

한편, 남아있는 등대들은 대부분이 완전히 자동화되어 등대지기나 등대 기술자의 인건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크게 절감되었다. 컴퓨터화된 오늘날의 등대는 자체에서 날씨를 분석하여 필요에 따라 안개경보 경적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치를 가동시키며, 육지로 가상 정보를 보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현대적인 등대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필요에 따라 해안가의 산이나 섬 등에 봉화를 피워 등대로 이용했다.

일본은 조선을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아, 1893년 6월 항로표지를 도입하였으며, 1895년 우리나라 전 해역에 걸쳐 등대 건설 지점을 조사하고, 그 건설에 주력하였다. 1902년 해안등대국이 설치되었고, 소월미도·팔미도·백암·북장자서 등에 등대건설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점등했다. 해방 직전까지의 우리나라 등대시설은 등대 32기, 등표 110기, 등부표 22기, 안개신호 18기, 무선전신 9기, 기상관측 23기였으나 태평양전쟁과 1950년 6·25전쟁 등으로 거의 파괴되어 1960년대초까지는 그 복구사업에 진력하였다.

1962년 9월 국제등대협회(IALA)에 가입하였고, 국제 해상교통 체계에 의한 계획적인 등대건설을 시작하여, 현재 우리나라의 등대시설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국제 수준의 시설을 확보하게 되었다. 1903년 점등을 시작한 장기갑등대(경상북도기념물 제39호)에는 1985년에 등대박물관을 건립하고 국내외의 등대관련자료 800여점을 전시하여 등대의 발전과정과 해양 개척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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