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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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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프랑스계 미국 가문.

처음에 화약과 직물로 재산을 모은 후 다른 제조업분야로 사업을 확장해갔다. 피에르 사뮈엘 뒤 퐁 (드 느무르)은 파리에서 태어나, 중농주의 경제학파의 주요한 집필가로 활동했다. 그의 자손들은 분가해 2 갈래의 뒤 퐁가로 나누어졌다.

첫아들 빅토르 마리 뒤 퐁(1767~1827)은 초대 주미 프랑스 공사관의 관원(1787), 라파예트의 부관(1789~91), 프랑스 공사관의 차석 서기관(1791~92) 그리고 수석 서기관(1795~96)을 두루 역임했다.

1800년에 그는 정착할 생각으로 미국에 돌아와 귀화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수입중개상을(1802~05), 그후에는 토지개발사업을 시도했지만 둘 다 실패하고, 남부로 가서 델라웨어 주 윌밍턴에서 동생 이레네 소유의 모직물공장을 운영했으나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후에 필라델피아 주에 있는 미국은행의 이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사뮈엘 프랑수아 뒤 퐁(1803~65)은 미국 해군장교였다. 그는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며, 메릴랜드 주의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의 교과과정을 기획하는 위원을 지냈다. 또한 남북전쟁 동안 남군의 북진을 막는 소함대를 지휘해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1863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의 방어선을 이끌며 해상공격을 벌인 것이 참패로 끝나 지휘권을 잃고 퇴역했다.

피에르 사뮈엘의 또다른 아들인 엘뢰테르 이레네 뒤 퐁(1771~1834)은 1800년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에 프랑스 왕실 화약공장에서 일했다. 미국 화약이 질이 나쁘고 비싼 것을 보고 연구를 더해 마침내 1802년 윌밍턴 근처에 화약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꽤 높은 수익을 올렸으며, 특히 1812년 전쟁중 큰 이득을 보아 그가 1833년에 이름 붙인 E. I. 뒤퐁드느무르사(社)의 성공적인 시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모직물공장을 세웠으며 부업으로 농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후계자는 두 아들로, 알프레드 빅토르 뒤 퐁(1798~1856)은 1834~50년 전통적인 방법으로 회사를 이끌었으며, 앙리 뒤 퐁(1812~89)은 보다 진취적으로 사업을 운영했다. 1833년 그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지만 1년 후 군대를 떠나 가족사업에 참여해 1850~89년의 번창기 동안 회사를 이끌었으며 특히 남북전쟁 후에 사업을 더 확장시켰다. 그는 캘리포니아처럼 멀리 떨어진 곳의 공장도 인수했으며 여러 관련기업을 통솔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형제와 조카 1명씩을 포함한 다른 가족구성원들과 동업자 관계를 맺었다.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인 앙리 알제뇽 뒤 퐁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남북전쟁에서 명예훈장을 받았다. 그는 1878년 가족사업에 참여하여 1899년 법인 설립을 위해 노력했으며, 1902년 은퇴하여 1906~17년에 델라웨어 주의 상원의원을 지냈다. 1902년 3명의 사촌인 토마스 콜레망 뒤 퐁(1863~1903), 알프레드 이레네 뒤 퐁(1864~1935)과 피에르 사뮈엘 뒤 퐁(1870~1954)이 회사 중역이 되어 가족 경영체제를 확고히 했다(→ 듀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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