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두보의 시풍과 판본

다른 표기 언어

요약 중국 성당 시기의 시인.

시풍

오늘날 전해지는 두보 시는 대략 1,470여 수이다. 그 시를 보면 고난으로 가득찼던 유랑의 시기에 따라 각각 시풍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다른 시인에게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드문 일이다. 두보 시는 그의 엄격한 정신을 표현한 격조 높은 것이었다.

철저하게 사실을 묘사하는 수법과 엄격한 성률에 의해 세상일이나 사람의 감정을 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백의 자유분방한 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두보 시의 긴밀하고 엄격한 구성은 이백을 앞서는 특히 율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초당에 완성된 금체 형식이 두보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두보의 고시와 악부에는 당시 눈앞에 보이던 사회모순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백성의 고난을 호소한 것이 많다. 이것이야말로 〈시경 詩經〉 이래의 풍유 정신을 계승한 것이고 이른바 중국 시의 올바른 전통이다. 백거이(白居易)와 원진이 두보의 시를 존중한 것도 그 풍유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함이었다.

이백의 시는 육조에서 안사의 난 전까지의 낭만정신이 최고로 발휘된 것이고, 두보는 안사의 난 이후의 현실주의적 시풍을 연 것이다. 나아가 그의 시는 다음 시대인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 등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오늘날까지 여전히 민중을 위한 시인으로 널리 존중되고 있다.

판본

두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윤주의 자사 번황이 〈두공부소집 杜工部小集〉 6권을 편집하여 그 서(序)에서 "문집 60권이 양쯔 강과 한수이 강[漢水] 부근 지방에서 읽히고 있다"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두보 시의 원고는 사후 곧 누군가가 베껴 써서 일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었던 것 같다. 〈구당서 舊唐書〉 문원전에도 '두보의 문집 60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대 진(晉)나라 개운 2년(945)에 관서본 〈두공부집〉이 있었음이 남송(南宋) 오약의 〈두공부집후기〉에 나타나 있는데 이것이 첫 간행본으로 추정된다. 북송시대에는 두보 시가 매우 유행하여 판본도 왕수의 〈두공부집〉 20권을 비롯해서 고금분체와 편년체도 있었으며 간행된 것도 매우 많았다.

두보 시의 주석은 예로부터 아주 많은데, 청대(淸代) 전겸익의 〈두시전주 杜詩箋注〉, 구조오의 〈두시상주 杜詩詳注〉, 포기룡의 〈독두심해 讀杜心解〉, 두양륜의 〈두시경전 杜詩鏡銓〉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히며, 그중에서도 구조오의 주(注)는 두보 시 주석의 집대성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성종 12년(1481) 유윤겸(柳允謙) 등이 두보의 시를 우리 말로 번역하여 〈두시언해 杜詩諺解〉를 지었다. 두보의 전기에 관해서는 원이둬[聞一多]의 〈소릉선생연보회전 小陵先生年譜會箋〉이 역작이고 펑즈[馮至]의 〈두보전 杜甫傳〉은 종래의 연구 중에서 뛰어난 것이다. 쓰촨 런민[人民] 출판사에서 펴낸 〈두보연보〉는 이 〈두보전〉을 많이 참고했다. 최근에도 궈모뤄[郭沫若]의 〈이백과 두보 李白與杜甫〉 등이 나와서 이백과 두보의 평가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두보는 이백과 더불어 여전히 중국 시인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작가

작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멀티미디어 더보기 1건의 연관 멀티미디어 두보(杜甫)


[Daum백과] 두보의 시풍과 판본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