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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복 후 자주독립을 위해 각 정당과 단체들이 만든 의회. 각 정당 대표들이 결집하여 자주독립의 촉구를 위해 정당 통일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하여 처음에는 좌우를 총망라한 50여 개 정당 및 200여 개 사회 단체의 각 대표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이 무조건 단결론을 제창하면서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까지 기회를 얻게 되어 이승만의 무원칙한 통합을 수용할 수 없던 세력들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한국 민주당계를 비롯한 보수 세력만이 지지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김구의 충칭 임시정부 측과도 합작을 이루지 못하면서 결국 이승만 주도의 정당 통일 운동은 실패하였고, 이후 신탁통치반대 위원회와 통합하여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되어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 남아 이승만의 기간 조직이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각 정당 대표들이 결집하여 자주독립의 촉구를 위해 정당을 규합하는 대표기구, 즉 정당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좌·우익을 총 망라한 50여 정당 및 200여 사회단체의 각 대표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총재로 추대된 이승만은 '우선 하나로 뭉치자'라는 무조건 단결론을 제창했는데, 이 주장은 그 동안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없었던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무원칙한 통합을 반대하는 여타 세력들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한국민주당계를 비롯한 보수세력만이 지지하였다. 그후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김구의 충칭[重慶] 임시정부측과의 협의에서도 합작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주도의 정당통일운동은 실패하였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민족통일정권수립을 갈망하는 민중의 기대가 간절했으나 이를 완수할 대중적 기반과 정치적 실력을 갖추지도 못한 채 일부 우익세력만으로 1945년 12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그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통합·발족했다. 그리고 이후의 정치과정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점차 이승만 노선으로 기울면서 이승만의 기간조직으로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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