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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도학적 경세론(經世論)에 입각한 지치주의(至治主義)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조광조(趙光祖) 중심의 정치세력을 가리키는 말.
도학은 원래 중국 송대·명대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전해졌다.
안유(安裕)·백이정(白頤正) 등에 의해 도입된 주자학은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조선의 건국이 추구되면서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도전·권근 등과 고려 왕조의 존속을 주장했던 정몽주 계열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뒤 도학의 정통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등으로 이어지는 학통이라고 인식되었으며, 이 학통을 이어받은 조광조·김식(金湜)·기준(奇遵)·김정(金淨)·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 등이 중종 때 중앙정계에 나아가 활약하게 되면서 '도학' 이념의 정치적 실현이 시도되었다(사림파).
이들 도학파가 내세웠던 정치적 이념은 요순삼대(堯舜三代)의 '지치'(至治)를 실현함으로써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들이 시도한 여러 가지 개혁정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개혁정치는 크게 인습과 구제도를 없애는 것과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이라는 2가지 측면에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전통적 명분을 회복하고자 하는 조치가 함께 시도되었다. 즉 세조의 즉위 과정이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갑자사화(甲子士禍)·중종반정(中宗反正) 등 여러 정변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들의 윤리적 정당성을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들과 표리관계를 가지면서 새로운 통치질서의 기반을 닦기 위해 성리학적 도덕질서에 어긋나는 궁중의 인습과 구제도의 혁파(革罷)가 추진되었다.
궁중 여악(女樂)·내수사(內需司)의 고리대(高利貸) 등의 폐지가 주장되었으며, 궁중 내의 불교행사인 기신재(忌晨齋)와 도교 의식을 행하는 기구인 소격서(昭格署)와 같은 것들을 없애려고 했다. 또한 중앙의 이러한 개혁정치와 함께 〈주자가례 朱子家禮〉·〈삼강행실 三綱行實〉 등의 윤리규범과 〈소학 小學〉과 같은 행동강령의 광범위한 보급·실천 운동을 통해 성리학적 윤리에 입각한 새로운 향촌질서를 수립하고자 했다.
특히 〈소학〉을 강조하고 권장했다. 왜냐하면 〈소학〉은 성리학이 설정한 교육목표를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같은 교육을 통해 '요순삼대'의 이상사회가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을 위해서는 그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 행위가 전제되었으며, 그것은 〈소학〉의 교육·실천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광범위한 보급을 위해 향교(鄕校)와 같은 지방교육기관이 재정비되었으며, 유향소(留鄕所)를 통한 향약(鄕約) 보급운동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와 같은 개혁정치를 이끌어갈 인재를 과거(科擧)가 아닌 천거(薦擧)를 통해 선발하고자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했다. 이와 함께 '현철군주론'(賢哲君主論)을 제기하여 경연의 강화를 통해 군주의 자질과 덕성을 함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치들은 그동안 정치적·경제적 기득권을 누려왔던 훈구파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으며, 특히 현량과의 실시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므로 이들의 완강한 저항을 초래했다. 그결과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게 되었고 도학정치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도학정치 이념은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게 이어져 이후의 정치·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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