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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당의 도교
중국을 재통일한 당이 들어서자 도교는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당 고조 이연은 노자와 성이 같다고 하여 자신을 노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당의 거대한 영토 전역에 걸쳐 도교가 널리 전파된 사실은 둔황의 석굴에서 발견된 수많은 도교 서적에서도 증명된다.
도홍경의 맥을 이은 왕원지가 남북의 도교를 종합하여 당대 도교의 기초를 다졌다. 중국의 극서지방에 위치한 둔황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여기에서 도가들은 불교를 비롯하여 교의상으로 매우 다른 조로아스터교·마니교와도 접촉했다. 〈장자〉의 사본이 토번 왕에게 보내졌고 카시미르 왕의 명에 의해 산스크리트로 번역되었다.
송·원 시대의 도교
① 중국 내에서의 발전 : 송과 원에서 도교는 종교적으로 크게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송대에는 부분적으로 이민족 침입에 자극받은 것이고, 원대에는 몽골 지배층에서 당시 유행하던 금강승으로부터 자극받은 것이다. 남송시대가 되면서 이민족에게 점령된 북부 중국에서 많은 수의 새로운 도교 종파가 생겨나고 이들은 급속히 세력을 확대시켰다.
② 도교 서적의 발전 : 일찍이 570년경 모든 도교학파의 학설을 알기 쉽게 이해할 필요성에 따라 최초로 방대한 도교 백과사전이 편찬되었다. 이것은 갖가지 서적에서 추출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러한 편찬서들은 송·원대에 상당히 많이 저술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운급칠첨 雲笈七籤〉(1022경)으로 송 이전의 도교를 총괄한 것이다. 전교를 위한 교훈적 소책자는 한층 대중적인 양식을 갖추었다. 또한 모든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수많은 비문이 있는데, 이것은 도가와 그들의 후원자에 대한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③ 금단의 발전 : 학식있는 전문가들이 연단술을 정제하면서 내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연금술). 제약용어인 내단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말할 때 쓰인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연단술에 대한 은유는 매우 일찍부터 생리학에 적용되어왔다. 예를 들면 갈홍은 정액을 '음불로장생약'으로 불렀다. 그러나 송대에 오면 체계적으로 내밀화되고 세련된 연단술이 매우 넓게 퍼져나감으로써 더 일찍부터 씌어진 외단에 관한 모든 책이 이때부터는 내단에 대해 쓴 것으로 믿어졌고 또한 이때까지 진짜 불로장생약을 만들려던 시도들을 더이상 속임수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④ 학설의 융합 : 유교는 이미 불교로부터 많은 점을 수용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도가들 또한 뒤늦지 않게 선종와 성리학의 학설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과 종합했다. 또한 민간 도교의 성격을 띤 3교 절충의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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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당·송 이후의 도교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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