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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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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8, 이라크 바그다드
사망 1958. 7. 14, 바그다드
국적 이라크

요약 이라크의 육군 장교, 정치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랍 통일을 위하여 힘썼던 정치지도자.

이라크가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있을 때인 1909년 투르크 육군장교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 동안에는 영국에 대항해서 싸우는 오스만의 군사작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곧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1916년 아미르 파이살 1세가 이끄는 샤리프 아랍군에 가담했다.

이 군대는 아랍을 속주로 삼고 있는 오스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영국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누리는 이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다. 전쟁이 끝날 무렵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 중심을 둔 아랍 국가를 세웠다. 이 국가는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누리는 이 정부에서 활발하게 일했다. 프랑스가 1920년 이 국가를 멸망시킨 뒤 파이살은 이라크 초대 왕이 되었다(1921). 누리는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여러 가지 요직을 맡았고, 1930년 총리가 되어 그 권한으로 영국과 20년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해 영국은 상당한 영향력을 여전히 행사하면서도 일단은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했다.

그는 14차례나 총리직을 맡으면서 특히 2가지 주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첫째는 영국을 지지하는 입장이고, 둘째는 파이살 왕이 1933년에 죽을 때까지 대표했던 하심 왕조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장파 장교들은 이 모두를 지지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양자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누리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고 이탈리아와 외교관계를 끊어 영국에 호응하고 싶었으나 장교들의 반발을 받았으며, 결국 1941년 4월 라시드 알리가 주도한 장교들의 쿠데타로 국왕과 함께 망명했다. 영국이 라시드 알리 정부를 패배시키자 누리는 이라크로 돌아와 1941~44년 동안 영국의 후원 아래 총리를 지냈다.

누리는 몇 개의 아랍 국가들이 단일국가로 연합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라크의 정치질서를 유지했다. 이라크는 1945년 아랍 연맹의 창립회원국이 되었다. 그는 경찰력과 언론을 유효적절하게 이용하여 이라크 왕정을 비판하는 자들을 탄압하며, 군사개입의 우려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는 영국과의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뒤 이라크에서 발생한 심각한 민족 감정으로 인하여 실패했다.

1955년 미국은 중동국가들 간의 상호방위조약인 바그다드 조약을 지원했는데, 누리는 이라크가 이 조약에 참여하는 것이 영국-이라크 조약이라는 골치아픈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여러 아랍 국가들이 이 조약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여 아랍 통합 운동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그럼으로써 이라크 국민의 지지를 받기 원했다. 그러나 바그다드 조약이 이러한 목적에 이용되기에는 서방세계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이 너무 드세었다.

1958년 2월 누리가 요르단(요르단은 서방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과 아랍동맹을 후원하자 아브둘 카림 카셈이 이끄는 이라크 군부가 왕정을 전복했고 누리는 1958년 7월 혁명의 와중에 군중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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