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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03. 12. 14, 프랑스 생레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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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66. 7. 2, 살롱 |
국적 | 프랑스 |
요약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언가였다.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의사로서 페스트를 치료하며 유명해졌다. 1547년경부터 예언을 시작, 〈세기들〉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는데 당시는 점성술이 크게 유행했던 때였다. 프랑스 남부의 살롱드 프로방스는 노스트라다무스가 머물던 곳으로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몇몇 예언은 정말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따라 명성도 커져갔고, 앙리2세의 왕비에게 초대받아 별점을 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어·스페인어·라틴어·히브리어 등이 뒤섞인 암호 같은 문체와 내용 때문에 그의 예언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예언에 대해 과학적 분석이 시도된 적도 있었으나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언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증폭됐는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언가였다.
1529년 아쟁에서 의술활동을 시작했고, 1544년 살롱으로 옮겨 1546~47년 엑스와 리옹 지방에 페스트가 돌았을 때 혁신적인 투약과 치료법으로 널리 유명해졌다. 1547년경부터 예언을 시작했고 1555년 이를 한데 모아 〈세기들 Centuries〉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표했다. 이 책은 100개를 1세기로 하는 수백 개의 4행 운문(韻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당시 점성술이 크게 유행했으며, 왕에게 바치는 이 책의 제2증보판은 1558년에 나왔다.
그의 몇 가지 예언은 정말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의 명성도 더욱 널리 퍼져 프랑스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전에 초대받아 그녀의 아이들을 위해 별점을 쳐주기도 했다. 1560년 샤를 9세가 국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시의(侍醫)로 임명되었다. 수많은 주석서를 갖고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들은 필사본이나 간행된 책들을 심사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금서청(禁書廳)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1781). 프랑스어·스페인어·라틴어·히브리어 등이 뒤섞인 암호 같은 문체와 내용 때문에 그의 예언들은 계속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그중 몇 가지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어떤 세부적인 일을 포함해서 그의 시대 이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예언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밖에 분명한 뜻을 갖지 않은 예언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미리 말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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