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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조아섕은 렌 지방의 브르타뉴 의회 의원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가 1세 때 죽었다.
그의 가족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었지만 가족의 연고지인 푸아투 지방은 위그노교의 본거지였다. 1606년 라 플레슈 예수회 대학에 입학하여, 훗날 프로테스탄트교를 탄핵한 자로 알려진 교부(敎父) 프랑수아 베롱에게 철학을 배웠다. 1614년 푸아티에에 가서 1616년 법학 학위를 땄다. 당시 푸아티에서는 위그노교도들이 루이 13세에게 격렬히 반항하고 있었다. 1618년 네덜란드 브레다로 가서 프로테스탄트 통치자인 오라녜 공(公) 마우리츠의 평화시(時) 군대에서 15개월 동안 수학과 군사건축학을 배웠다.
여기서 의사 이사크 베크만의 격려로 수학을 공부하고 〈음악에 관한 소고 Musicae Compendium〉(1618 저술, 사후 출판)를 썼다.
1619~28년 북·서 유럽을 여행했다. 보헤미아에 머물렀던 1619년 장차 인간의 권능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학자 및 철학자가 되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1620년경에 이미 모든 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연역적 추론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또 그는 자연에 대한 신지학적(神智學的) 지식도 검토했으며, 마술사 레이몽 륄과 연금술사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추종자들에게 실망했지만 독일의 수학자이자 장미십자회원인 요한 파울하버의 영향을 받은 상태였다.
1620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로마 가톨릭 군대에 몸담았다가 1662년 파리로 건너갔다. 이때 장 루이 게 드 발자크, 테오필 드 비오, 클로드 미도르주, 교부 마랭 메르센 등의 친구를 사귀었다.
특히 메르센은 일생 동안 수백명의 학자·저술가·수학자·과학자 등에게 서신을 보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해준 박식한 사람으로, 데카르트가 더욱 광대한 지적 세계와 접촉하도록 만든 주요인물이었다. 데카르트는 저서를 출판하기 훨씬 전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8년 과학에서는 확실성과 마찬가지로 개연성이 중요하다는 연금술사 샹두의 주장을 거부하고 확실성을 얻기 위한 자신의 방법을 이야기했다.
예수회 체제에 맞서 1611년 오라토리오회 교육체제를 기초하고 평신도로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프로테스탄트교와 싸웠던 베륄 추기경은 이에 깊은 인상을 받고 데카르트를 초대했다. 평론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베륄은 예수회의 토마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데카르트에게 아우구스티누스주의 형이상학을 집필하도록 권고했다.
베륄은 데카르트를 가톨릭에 귀의시키고자 애썼으나 결국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네덜란드로 떠나 거처를 숨기면서 16년 동안 프랑스에 돌아오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교를 포함한 이교도에 대한 가톨릭교의 박해가 심했던 프랑스와 달리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의 안식처였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루칠리오 바니니처럼 신의 기적을 자연적으로 설명한 죄목으로 화형을 당하거나(1619)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에 충성하는 군대에 징집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독창적인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데카르트는 1629년 네덜란드 프라네커대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로마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의 초안을 썼다.
1630년 라이덴대학교에 등록하여 의사 앙리 르네리를 제자로 맞아들였다. 1631년 덴마크를 방문했고 1633~34년 의사이자 연금술사 에티엔 드 빌브레시외와 함께 독일에 머물렀다. 의사 H. 레기우스가 1639년 위트레흐트대학교에서 데카르트의 견해를 가르치자 칼뱅주의 신학자 기스베르투스 뵈티우스와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은 데카르트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데카르트는 1648년 〈뵈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프로테스탄트교와 가톨릭교는 같은 신을 숭배하기 때문에 둘 다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용과 인권을 호소했다. 그러나 논쟁이 심화되자 데카르트는 프랑스 대사 및 친구인 콘스탄테인 호이헨스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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