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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1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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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608. 12. 21, 런던 스테프니 |
국적 | 잉글랜드, 영국 |
요약 잉글랜드의 정치가.
엘리자베스 1세 때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주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사건에 관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스코틀랜드계인 그는 1566년 스코틀랜드 주재 잉글랜드 대사 헨리 킬리그루의 비서로 스코틀랜드에서 약 10년간 머물렀다.
그뒤 네덜란드에서 공무원으로(1576~79), 스코틀랜드에서 사절로 일했고(1583, 1584) 1585년 다시 네덜란드에서 근무하다가 1586년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해에 네어즈버러 출신 하원의원과 추밀고문관이 되었고 9월 30일에는 프랜시스 월싱엄 경과 함께 국무장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추밀고문관으로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를 재판하도록 임명된 위원회에 속해 있었지만 그 소송절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메리를 처형하는 집행 영장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명을 받아낸 사람은 바로 그였다. 이 자리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넌즈시 비쳤으며 그후에 다시 만나서도 그랬다. 그러나 메리의 감금을 맡았던 에이미어스 폴릿 경과 드루 드루어리 경은 이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벌리 경이 소집한 추밀원은 즉시 사형을 집행하도록 결정했고 메리는 1587년 2월 8일 참수됐다.
처형 소식에 격분한 엘리자베스는 특히 데이비슨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는데 그녀는 데이비슨이 영장을 발부하지 말라는 그녀의 명령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체포되어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다. 1587년 3월 28일 성실청(星室廳)에서 직무태만과 법률 모욕죄로 재판을 받았으나 여러 판무관들 덕분에 혐의를 벗었다.
그러나 1만 마르크의 벌금형과 여왕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감금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1589년 9월 풀려났는데 벌금을 낸 것 같지는 않으며 오히려 평생 연금을 받았다. 풀려난 뒤로 여왕의 총애를 다시 누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스테프니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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