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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3. 2. 12, 미국 뉴욕 유티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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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5. 4. 14, 코네티컷 뉴헤이번 |
국적 | 미국 |
요약 미국의 지질학자·광물학자·박물학자.
남태평양과 미국 북서부 및 유럽 등 여러 지역을 탐험하면서 산의 생성, 화산활동, 해양 생물, 대륙 및 해저분지의 기원과 구조 등에 대해 중요한 연구를 했다.
데이너는 찰스 바틀렛 아카데미에 다니다가 1830년 예일대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1833년 예일대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지중해의 미국 해군 순양함에서 해군사관생도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1836년 뉴헤이번으로 돌아와 스승이자 예일대학교의 화학 및 광물학 교수인 벤저민 실리먼의 조수가 되었다. 데이너의 위대한 창작력이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24세 때 〈광물학 체계 A System of Mineralogy〉(1837)를 출판하면서부터였다.
580쪽에 이르는 이 저서는 수없이 판을 거듭했고, 아직도 광물학 분야의 기본 입문서로 쓰인다. 1838년 데이너는 찰스 윌크스와 함께 미국 남태평양탐험대에 들어갔다. 그는 이 탐험대에서 4년간 지질학자로 일했으며 동물학 분야의 작업도 대부분 담당했다. 탐험여행에서 돌아온 지 2년 뒤인 1844년 예일대학교 시절의 스승인 실리먼 교수의 딸 헨리에타 실리먼과 결혼해 뉴헤이번에 정착했다.
데이너는 넘쳐흐르는 힘을 주로 과학에 쏟아부었다. 그의 저작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1844~54년에 발표된 책과 논문 등은 약 7,000쪽에 이르렀고, 여기에 실린 수백 장의 삽화도 대부분 직접 그린 것이었다. 또한 윌크스 탐험대의 여행에 관해서도 삽화를 넣은 4권의 4절판 책과 수많은 논문을 남겼다.
데이너의 노력은 주로 지질학에 집중되었다.
그는 교과서 〈광물학 입문 Manual of Mineralogy〉(1848)을 비롯해 모두 3판까지 발행된 〈광물학 체계〉 등 수많은 저서를 출판했다. 특히 〈광물학 체계〉를 전면 수정한 개정판에서는 수학·물리학·화학을 토대로 광물분류의 체계를 세웠다. 이와 같은 10년간의 활동을 통해 데이너가 미국 지질학에 미친 영향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미국 과학 저널 American Journal of Science〉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벤저민 실리먼이 창간한 이 잡지는 과학 연구를 이끄는 주요기관지였다.
데이너는 이 잡지의 편집장이자 필자로서 평론과 창작 논문을 기고하고 여러 학설을 예리하게 종합하는 글을 써 미국 지질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가장 박식한 과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지질현상을 일으키는 물리적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구의 물리적 특성이 형성된 과정, 대륙과 해저분지의 기원 및 구조, 산맥형성의 본질, 화산활동 등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편화시키는 빛나는 업적을 이룩했다. 데이너는 그 자신의 연구와 미국이나 외국 지질학자들의 저서를 토대로 하여 '지구를 시간에 따라 발달하는 지질학적 단일체'로 간주하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는 또한 지구가 원래 액체상태였다가 차츰 식으면서 수축했다는 지구 수축설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대륙은 맨 먼저 식은 지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구가 계속 수축함에 따라 대륙지각 사이에 끼어 있던 해양지역이 밑으로 가라앉았으며, 가라앉는 해양지각은 주기적으로 내부로 수축하고 이로 인해 대륙지각 가장자리에 압력을 주어 애팔래치아·로키·안데스 산맥 등의 커다란 산맥들을 솟아오르게 했다고 설명했다.
데이너는 지구의 물리적 특성이 서서히 변화했음을 강조했지만, 처음에는 생물의 진화개념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850년대초에 이르자 데이너는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로서 당시의 뛰어난 과학자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와 교류를 가진 과학자들 중에는 미국의 유명한 식물학자 에이서 그레이, 스위스 태생 박물학자인 하버드대학교의 루이 아가시 교수, 찰스 다윈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그의 생각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하버드대학교에서 데이너에게 교수직을 제의하면서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이자 이에 자극받은 예일대학교의 친구들은 자연사 부문에서 실리먼 교수가 맡았던 자리에 그를 임명했고 데이너는 1856년 이 자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859년 과로로 쓰러져 결국 죽을 때까지 쇠약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후 35년간 그는 대중과 격리된 채로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이 기간 동안 데이너에게는 숱한 학문적 명예가 쏟아졌기 때문에, 만약 그가 그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격리생활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직위들 중에는 미국과학진보협회 회장과 미국지질학회 회장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국립과학 아카데미의 창립 회원이기도 했다.
데이너는 건강이 나쁜데도 저술활동을 계속했다.1862년에는 지질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교과서 〈지질학 입문 Manual of Geology〉(4판)을 출판했고, 1864년 좀더 초보적인 〈지질학 교본 A Text-book of Geology〉을 내놓았으며, 1872년에는 유명한 〈산호와 산호섬 Corals and Coral Islands〉을 출간했다.
이 저서는 윌크스 탐험대 여행 때부터 시작한 산호초 연구의 결정판이었다. 데이너는 누구보다도 자세히 산호섬을 조사해, 둥근 고리 모양의 산호초가 형성된 것은 바다 밑바닥이 가라앉은 증거라고 한 다윈의 관찰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 데이너의 독자적 결론에 따르면, 암초를 이루고 있는 산호는 바닥이 단단한 열대의 얕은 바다에서만 살며 흔히 화산섬 주변에 둥근 산호초를 형성한다고 한다.
즉, 바다 속에 잠겨 있는 섬의 측면 부분에서 산호암이 발견되고, 또 그것이 환초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발견으로 이전에 존재했던 넓은 화산지대는 산호초들만을 흔적으로 남긴 채 태평양 속으로 사라져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말년에 데이너는 다윈이 내놓은 진화론과 논쟁을 했는데, 평소 신앙심이 깊었던 데이너는 모든 생물들이 각각 특별하게 만들어졌다는 창조론을 믿었다. 그러나 또다른 한편으로는 생물과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데이너의 동물학 지식에 비추어볼 때 다윈의 주장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결국은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너는 〈지질학 입문〉의 마지막 판에서야 처음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였다. 데이너에게 자연과 신은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가 자연에서 관찰한 생물의 끊임없는 진보는 그것을 창조하고 계획한 신의 존재를 뚜렷이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지질학은 그의 영향으로 서로 관계없는 사실들을 수집·분류하는 단계에서 보다 성숙한 과학의 단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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