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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비

다른 표기 언어 Thomas Stanley, 1st earl of Derby
요약 테이블
출생 1435경
사망 1504. 7. 29, 잉글랜드 랭커셔 라톰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스탠리 가문을 일으킨 존 스탠리 경의 증손자로 1454년 국왕 헨리 6세의 시종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482년경 그는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후에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와 재혼했다. 1483년 헨리 튜더를 왕위에 앉히려는 반란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리처드 3세의 즉위를 받아들였으며 왕의 시종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리처드 3세는 커다란 세력을 지닌 스탠리와 반목할 입장이 되지 못했으나 1485년초, 스탠리가 랭커스터의 자기 영지로 은퇴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자 의심을 품었다. 헨리 튜더가 영국에 돌아온 뒤 스탠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리처드 3세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보즈워스 평원의 전투가 끝난 뒤, 싸움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던 스탠리는 헨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헨리 7세는 그가 모든 공직을 계속 지니도록 허락했고 더비 백작 작위를 내렸다.

스탠리 가문을 일으킨 존 스탠리 경(1414경 죽음)의 증손자인 토머스 스탠리는 1454년 국왕 헨리 6세의 시종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459년 8월 블로어히스 전투 때 동생 윌리엄이 요크가(家)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싸운 반면 스탠리는 상당한 병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헨리 6세의 군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1461년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스탠리는 체셔 주(州)의 재판장에 임명되었으나 10년 뒤 워릭 백작이 랭커스터 가의 복위를 시도했을 때 워릭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도 에드워드 4세는 워릭이 몰락한 뒤 스탠리를 왕실의 시종으로 삼았다. 1482년경 그는 망명해 있던 헨리 튜더(후에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와 재혼했다.

스탠리는 에드워드 4세의 유언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처음에는 어린 국왕 에드워드 5세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그는 헨리 튜더를 왕위에 앉히려는 반란이 일어나자(1483) 여기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리처드 3세의 즉위를 받아들였으며 왕의 시종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이 반란에 깊이 관여했다.

그뒤 잉글랜드의 컨스터블(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아내를 비밀장소에 안전하게 보호하는 대신 그녀의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리처드 3세는 커다란 세력을 지닌 스탠리와 반목할 입장이 되지 못했으나 1485년초, 스탠리가 랭커스터의 자기 영지로 은퇴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하자 의심을 품었다. 그해 여름 리처드는 스탠리에게 아들 스트레인지 경(卿)을 볼모로 궁정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헨리 튜더가 영국에 돌아온 뒤 스탠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리처드 3세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보즈워스에서 전투가 있던 날 아침(8. 22) 스탠리가 또다시 소환에 응하지 않자 리처드는 스트레인지 경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무시되었고 스트레인지는 달아났다. 보즈워스 평원의 전투가 끝난 뒤, 싸움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던 스탠리는 헨리의 머리에 왕관을 씌웠다. 헨리 7세는 그가 모든 공직을 계속 지니도록 허락했고 더비 백작 작위를 내렸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토머스가 더비 백작 2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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