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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외교활동 지원을 위해 결성된 청년단체. 독립정신을 보급하고 외교로 인해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외교시보>와 <국치기념경고문> 등의 홍보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이후 국내의 청년단체들을 연합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 계획을 세웠으나 1919년 11월 조직이 드러나 무산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직후 조소앙(趙素昻)이 국제무대에서 외교활동을 위해 구주행을 준비할 무렵, 상하이에서는 조용주(趙鏞周:조소앙의 동생)·연병호(延秉昊)·송세호(宋世浩) 등이 외교활동 지원단체로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결성을 계획하고, 국내에 들어와 안재홍(安在鴻)·이병철(李秉澈) 등과 연결하여 조직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독립정신의 보급 및 선전과 아울러 세계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독립실현을 보장받는 데 있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중앙부에는 총무부를 비롯하여 외교부·편집부·재무부의 부서와 외교원·외교특파원 등을 두었으며, 대전·회령·충주 등지에 국내지부, 상하이에 해외지부를 설치했다.
안재홍·이병철이 총무를 맡았는데, 안재홍은 강령 및 규칙 등 운영의 기초가 되는 문안작성의 일을 맡고, 이병철은 자금과 조직을 맡았다. 그리고 조소앙이 외교특파원으로, 또 조용주·연병호 등이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외교시보 外交時報〉 및 〈국치기념경고문〉 등의 선전물을 인쇄·배포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독립운동참가단체조사표'·'피체의사 조사표'·'가옥파괴조사표' 등을 작성하여 국내 독립운동 상황을 임시정부에 통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원의 해외파견 및 기관지 발행 등 외교선전에 치중하여 중앙부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이에 외교활동에 편중된 조직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내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하순부터 배달청년당으로 개편을 추진했으나, 1919년 11월말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계획이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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