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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49년 11월 12일 이승만(李承晩)을 지지하고 내각책임제개헌을 반대하던 세력인 신정회 23명 전원, 일민구락부의 일부인 24명과 대한노동당의 20명 및 무소속 4명 등으로 결성된 정당.
이승만이 내세운 일민주의 구현을 당시로 채택했다. 이렇게 결성된 대한국민당은 당시 대다수 정당이 그러했듯이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적 기반을 결여한 채 총 198석 가운데 71석의 의석만을 확보한 원내정당이었고, 윤치영(尹致暎)·이인(李仁)을 중심으로 이승만계의 여당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국민당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한국민당은 원내에서 주요한 정치적 상대인 민주국민당에 맞서 적극적으로 개헌반대운동을 전개하고 국민총궐기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이탈표를 막기 위해 일종의 공개기권투표를 연습하기도 했다. 조직은 중앙집행부에 최고위원제를 설치했으며 각 부서의 부장으로 하여금 업무를 수행하게 했다. 지방조직은 미조직 상태에서 출발하여 당원을 그다지 확보하지는 못했다.
1950년 5·30선거에서 165명의 후보자를 내어 총 210석 가운데 24석밖에 확보하지 못했고, 더욱이 보수와 혁신의 양파로 대립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대한국민당과 자신은 '무관'함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한국민당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갔다. 결국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으로 개원된 국회에서 대한국민당과 대한청년단을 배경으로 한 소장의원들이 민정동지회를 구성하고, 다시 1951년 3월 4일 교섭단체의 재편성과정에서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신정동지회로 발족하여 친여당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자연히 대한국민당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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