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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운동

다른 표기 언어 大同團結運動

요약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전기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한 자유민권운동의 후반기에 나타난 정치운동(→ 자유민권운동).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 호시 도루[星亨],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호시와 나카에 등이 구 자유당 당원들에게 '소이(小異)를 버리고 대동단결할 것'을 호소한 데서 시작되었다. 즉 1884년 10월 29일 자유당이 해체되고 같은 해 12월 17일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 총리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限]I 부총리 고노 도가마[河野敏鎌]의 입헌개진당 탈당으로 나타난 민권파의 분열을 수습하고 재결집을 도모한 것이다.

호시와 나카에는 1886년 10월 24일 도쿄에서, 1887년 5월 15일 오사카에서 전국유지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그 사이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고토, 오쿠마가 백작으로 봉해졌지만 고토는 같은 해 10월 3일 각파의 운동가를 모아 간담회를 열어 정해구락부(丁亥俱樂部)를 결성했다. 다음날 각파 유지의 간담회가 도쿄에서 개최되었고, 같은 달 9~10일에 걸쳐 각파 연합연설회가 역시 도쿄에서 개최되어 각지의 소시[壯士:메이지 시대의 직업정치가]들이 결집했다. 29일에는 여러 현의 각파 대표가 도쿄에서 회합을 열고 언론·집회의 자유, 지조경감(地租輕減), 평등조약을 주장하는 소위 '삼대사건건백운동'(三大事件建白運動)에 합의했다. 같은 달 고치 현[高知縣] 대표가 원로원(元老院)에 건백서를 제출했고, 12월 15일에는 2부 18현의 대표가 건백서를 제출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그러나 정부는 25일 보안조례(保安條例)를 적용하여 대탄압을 가함으로써 수백 명에 이르는 지도적 자유민권운동가를 도쿄에서 추방시켰으며 나아가 1888년 2월에는 오쿠마를 입각시켜 운동의 분열을 획책했다. 이에 대하여 고토는 4월 22일 후쿠시마[福島]에서 도호쿠[東北] 지방유지의 간담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7월 5일부터 8월말까지 신에쓰[信越]와 도호쿠를, 12월 7일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도카이[東海]와 호쿠리쿠[北陸]를 순회연설하면서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또한 1888년 6월 기관지 〈세이론 政論〉을 발간했고 강력한 민권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국헌법(帝國憲法)이 발표된 직후인 1889년 3월 고토가 갑자기 구로다[黑田] 내각에 입각 함으로써 절정을 맞고 있던 반정부운동은 일거에 냉각되어버렸다. 고토가 빠진 대동단결파는 대동단결파 강령위원회에서 정치결사를 조직하고자 하는 고노 히로나카[河野T中] 등의 정사파(政社派)와 느슨한 연합을 주장하는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 등의 비(非)정사파로 분열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전자는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를, 후자는 대동협화회(大同協和會)를 결성함으로써 대동단결은 실패로 끝나고 자유민권운동은 종말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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