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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안후이 성[安徽省] 초군(&C75F3;郡:지금의 쑤 현[宿縣]), 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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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396 |
국적 | 중국, 동진(東晉) |
요약
중국 동진 때의 조각가·화가·학자.
(병). Dai Kui. (웨). Tai K'ui.
자는 도안(道安). 이후에 회계성(會稽省) 염현(剡縣:지금의 저장 성[浙江省] 신창[新昌])으로 옮겨 살았다. 거문고의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결코 왕이나 제후를 위해 연주하지는 않았다. 인품이 고상하여 당시의 유명한 인물인 사안(謝安)·사현(謝玄)·왕순(王珣)·왕휘지(王徽之) 등에게 존경을 받았다.
당시 상류사회 인사들의 방탕한 행위에 대해 〈방달비도론 放達非道論〉을 지어 비평했다. 또 그 시기에 성행한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신불멸론'(神不滅論)의 상반된 견해로 〈석의론 釋疑論〉과 〈유화부 流火賦〉를 지었고, 이름난 승려인 혜원(慧遠)과 논쟁을 벌였다.
회화에서는 종교 인물·산수·풍속·가축 등에 두루 뛰어났고, 특히 인물화에 뛰어나 위협(衛協) 이후와 고개지(顧愷之) 이전의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사혁(謝赫)은 〈고화명록 古畵名錄〉에서 "시정이 세밀하고 풍취가 뛰어나며, 구도가 훌륭하여 모든 기법의 모범이 되며 순욱(荀勖)과 위협 이후에 제1인자로 불린다"라고 말했다. 고개지는 그의 〈칠현도 七賢圖〉 등의 작품을 대단히 높이 평가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가 산수화의 창설기였으므로 그도 역시 산수화의 선구자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작품으로는 〈오중계산읍거도 吳中溪山邑居圖〉 등이 있으며 이에 대해 장언원(張彦遠)은 "산수가 매우 미묘하다"라고 평했다. 또 그는 조각에 특히 뛰어나 회계의 이름난 절에 있는 목조(木彫) 무량불(無量佛)과 보살상을 조각할 때는 휘장 속에 숨어 사람들의 의견을 들은 뒤, 이를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3년 만에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난징[南京]의 와관 사[瓦棺寺]에 있을 때 조각한 〈오세불 五世佛〉은 고개지의 유명한 그림인 〈유마힐상 維摩詰像〉, 사자국(獅子國:지금의 스리랑카)이 보내준 옥불(玉佛)과 더불어 '3절'(三絶)로 손꼽히는 명작이다.
고개지와 마찬가지로 대규 역시 불교예술을 중국화한 위대한 스승이다. 또한 최초의 협저불상(夾紵佛像)은 대규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최근에 장쑤 성[江蘇省] 난징 일대에서 출토된 〈죽림칠현상 竹林七賢像〉과 이미 발견된, 남조 초기와 관련이 있는 금동불상(金銅佛像)은 대규의 그림과 조각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의 아들인 발과 앙(æ)은 모두 아버지의 풍격을 이어받았는데, 손창지(孫暢之)는 산수화에 뛰어났던 발을 고개지보다 뛰어난 화가라고 평했고, 장언원은 조각에 뛰어났던 앙을 신기(神技)에 가까운 솜씨를 지닌 천재로 평하고 아버지 대규와 같은 위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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