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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지적 발전과 공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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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에 버금가는 당대의 문학가는 구이도 구이니첼리였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일종의 지방시 즉 '자유시'(自由市)의 시문(詩文)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시인으로, 그의 시는 카발칸티와 단테가 바라고 있던 것, 즉 세련되고 명쾌한 미감(美感)에 내포된 비범한 즐거움의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 그의 시가 호소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철학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인 내용 때문이었다. 그의 시는 귀부인을 칭송하고, 그녀가 숭배자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미덕인 '고귀한 감정'(gentilezza)을 찬양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가 격찬했던 사랑이라는 개념은 순화되고 고귀한 삶의 의미의 일부였다. 〈신생〉의 시적·정신적 전환점에 기여한 것은 바로 그러한 구이니첼리의 영향이었다. 17~21장에 씌어진 바와 같이 단테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했으며 고뇌의 시를 쓰는 대신 그의 연인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특히 〈사랑을 이해하는 귀부인들 Donne ch'avete intelletto d'amore〉이라는 칸초네가 그런 시이다. 이 칸초네 바로 뒤에 〈사랑과 고귀한 마음은 하나라네 Amore e 'l cor gentil sono unacosa〉라는 소네트가 이어지는데, 이 소네트의 첫 행은 구이니첼리의 "모든 고귀한 마음 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네"(Al cor gentil ripara sempre amore)에서 따온 것이 분명하다.

이로써 단테는 '돌체스틸누오보'(dolce stil nuovo) 또는 청신체(淸新體)라는 새로운 시 양식을 쓰기 시작했는데, 좀더 지방적인 시의 협소한 한계를 넘어서는 단순한 수단으로서 이 양식의 중요성을 그는 〈연옥편〉(24장)에서 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시에 대한 관심으로 단테의 인생이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 사실은 〈향연〉에 잘 나타나 있다.

베아트리체가 죽은 뒤 마음의 위안을 찾으려했던 단테는 철학, 특히 보에티우스와 키케로의 작품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잠시 슬픔을 잊기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의 본업이 되었고 그의 인생 경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신생〉에 등장하는 우아한 여성이 철학이라는 이름의 귀부인으로 바뀌어 곧 단테의 생각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철학에 관한 토론을 듣기 위하여 피렌체의 종교 학교들을 다니기 시작하였고, 30개월도 채 되기 전에 "그녀(철학)에 대한 사랑이 다른 모든 생각을 쫓아버렸다"고 말한다.

〈지성을 통해 3차원의 영역을 움직이는 그대 Voi che 'ntendendo il terzo ciel movete〉라는 시에서 그는 베아트리체 및 〈신생〉과 연관된 청신체, 즉 감미로운 옛 문체를 버리고 철학과 관련된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새 문체로 전환하게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 기간의 연구가 일련의 칸초네로 표현되었고 이 칸초네들은 결국 〈향연〉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시적 토대가 되었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도시자치정부 코뮌의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었다.

1295년 의약(醫藥)조합(철학자들도 가입할 수 있었음)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공직에 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가 공직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시(市)정치사상 아주 위험한 때였다. 구엘프당과 기벨린당의 시대에 시민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처럼 1290년대의 피렌체는 다시 한번 둘로 양분된 도시가 되었다. 당시 피렌체의 집권당이던 구엘프파가 코르소도나티가 이끄는 '흑당'(黑黨)과 단테가 속한 '백당'(白黨)으로 분열되었던 것이다.

백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후 흑당을 추방했다.

1295년 이후 단테의 활동에 관해서는 많은 정보가 남아 있다. 1300년 5월 그는 주요한 외교사절로서 이웃 도시인 산지미냐노에 파견되었는데, 이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전쟁준비를 갖추고 왕위에 오르려는 야심에 대항하여 토스카나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구엘프당 동맹의 결속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였다.

1300년 행정장관으로 선출되었을 때 단테는 이미 교황(보니파시오 8세)의 정책에 저항하기로 결정한 코뮌정치가들의 대변인으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이리하여 교황권의 범위에 대한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당은 1266년 피렌체에서 프랑스 군대와 교황 군대의 동맹에 의해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렇지만 1300년까지 단테는 교황의 야심적인 영토확장정책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또 한번의 더 큰 지적 세계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온건파 구엘프당원이었던 단테는 교황이 정치에 관여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고, 이 경험을 통해 결국 제정(帝政)의 정치적 권위가 교황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입장은 〈향연〉을 필두로 나중에 논쟁적인 저작 〈제정론〉과 〈신곡〉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더욱이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여 단테는 계속 교황의 정책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황, 프랑스(필리프 4세의 동생인 발루아가(家)의 샤를 왕이 보니파시오와 제휴했음), 추방된 구엘프 흑당이 새로 동맹을 맺었는데, 발루아의 샤를 왕이 피렌체 입성허가를 원했을 때, 도시 자체는 정치적인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교황의 본의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사절단이 로마로 파견되어 교황과 이 문제를 놓고 토론하게 되었는데, 단테가 그 사절단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당혹스럽게 생각해 "내가 가면 누가 남고, 내가 남으면 누가 가는가?"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결국 단테는 책략에 넘어갔다. 교황은 다른 두 사절은 떠나 보내고 단테는 붙잡아 두었다. 1301년 11월초 발루아의 샤를 군대는 피렌체 주둔을 허락받았다. 바로 그날 밤 추방당했던 흑당이 은밀하게 다시 피렌체로 들어와 6일 동안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단테는 처음 로마에서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시에나에 와서야 이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었다. 1302년 1월 새 피렌체 정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단테가 이에 응하지 않자 3명의 전(前)통령까지 포함하여, 범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기소당했다. 다시 출두명령을 받고도 출두하지 않자 1302년 3월 10일 단테는 다른 14명의 백당 당원과 함께 화형선고를 받았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신곡〉에서 이러한 불화의 이야기가 강렬하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사실상 그가 이 사건을 길고 긴 예언이 지적하는 주된 극적 장면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곡〉은 그 자신의 개인적 재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길을 보이려는 목적에서 쓴 작품이기도 하기에 이 시는 진정한 〈신곡〉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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