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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앙

다른 표기 언어 檀君信仰

요약 고조선을 세운 단군에 대한 신앙.

단군

단군상, 충청남도 온양시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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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교·도교 등의 종교를 수용하기 이전부터 전해지는 민간신앙으로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고 숭봉(崇奉)하는 형태를 띤다.

단군신화에는 고조선의 생산력 수준, 자연인식 능력과 그에 연관된 세계관, 신앙 등이 반영되어 있다.

단군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손자이며 그의 신하인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는 당시 농경사회를 지배하는 자연조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단군과 그의 가계를 천손족(天孫族)의 위치로 신격화시켰으며 동시에 바람·비·구름 등의 자연물 신앙이 보조적으로 쓰였다. 그러나 현존 사료나 유물 중에는 고조선의 신앙이나 의례(儀禮)를 설명해 줄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진한의 소도(蘇塗) 등에서 천신에게 제사드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조선에도 그와 유사한 천제(天祭)의 전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단군신앙의 전통이 문헌으로 확인되는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삼국사기〉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기사와 1131년 묘청이 임원궁에 지은 8성당(八聖堂)의 하나인 '구려평양선인 실덕연등불'(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을 살펴보면 최소한 12세기 이전에도 단군을 수호신으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13세기에 이르러 거란과 몽고의 침략 속에서 고려사회의 내부 갈등을 극복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는 일련의 저술이 행해졌다.

〈삼국유사〉·〈제왕운기 帝王韻記〉 등이 대표적 저술이며 그후 조선 초기에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삼국사략 三國史略〉 등으로 이어져 단군이 조선족의 건국시조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단군 숭배는 평양의 단군사(檀君祠)나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등에서 국가적 의례로 행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민족주의 역사관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단군신앙이 재조명되었다. 대표적 예로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의 저술을 들 수 있다. 1909년에는 환인·환웅(桓雄)·단군을 모시는 종교단체인 대종교가 생겨났으며 그밖에도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한 많은 신종교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신종교는 단군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최제우(崔濟愚)나 증산교(甑山敎)의 강일순 등을 함께 숭배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통적인 단군신앙단체로 보기는 어렵다. 단군신앙은 민족적 위기 때마다 민족를 결집시키는 집단적인 상징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고려 말이나 조선 후기에는 외세의 침탈에 맞서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은 단군신앙이 낳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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