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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7. 9. 21, 일본 요코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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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일본의 법률가.
다카하시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교[あ茶の水女子大學校]를 졸업한 뒤 도쿄대학교[東京大學校]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녀는 1953년에 노동성 여성국에 들어가 고용통계과 과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여성청소년과 과장으로 일하면서 그녀는 직장여성들이 아직도 책상을 청소하거나 차 시중을 드는 등의 잡무를 요구받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성차별 사례를 알게 된 그녀는 일본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킬 책임을 스스로 떠맡게 되었다.
몇 년 뒤 정부가 여성의 평등권을 확립하는 법안을 제출해 의회의 승인을 얻은 것은 그녀가 거둔 뜻깊은 승리였다.
1980년에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의에 일본 대표로 참석한 지 2년 뒤, 다카하시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아시아 여성들 사이의 관계와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 제휴기관인 아시아 여성 교류 연구 포럼의 의장이 되었다. 아시아 여성들 사이의 관계를 더욱 긴밀히 하는 것은 그녀의 가장 큰 포부 가운데 하나였다. 이듬해 그녀는 '21세기 직업재단'이라는 관련단체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경제학 분야의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던 다카하시는 일본 사법기구에 여성이 없는 것, 특히 최고재판소에 여성대표가 없는 것에 대해 자주 우려를 표명했다. 그녀는 또한 미국 대법원 판사 9명 가운데 2명이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1994년 2월, 당시 일본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는 결원이 생긴 최고재판소 판사에 다카하시 히사코를 선임했다. "국민에게 주는 선물"로 언론에 소개된 다카하시는 명망 높은 최고재판소 판사에 임명된 일본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다카하시가 최고재판소 판사로서 14명의 남자 동료들과 합류하게 됨으로써 이 차이는 다소나마 좁혀졌고 여권운동은 크게 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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